작성자
기자부
작성일
2020-10-25 10:04
조회
1666
10월 25일 주일 2부 , 3부 ㅡ광야의 고통을 겪는 인생! (왕상19:1-8)
2부 9시예배 .....
3부 11시예배 ....
광야의 고통을 겪는 인생!(왕상19:1-8)
우리는 열왕기상 19장을 통해서 북방 에브라임의
가장 어두운 역사의 현장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의 가장 힘들었던 삶의 한복판을 바라보게 됩니다.
역사도 힘들고 어렵고 하나님의 사람의 인생도 가장 힘든
터널을 지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솔로몬 이후에 하나님의 주권과 공급에 대한 감격의 삶을 살았는데
솔로몬은 한동안은 듣는 마음도 있었고 순종했지만 이방 여인과의 결혼과 동시에
삶이 처절하게 무너집니다.
그의 처첩들이 우상 앞에 경배하는 만행들이 자행되면서
이스라엘은 몰락의 길로 접어듭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솔로몬을 징벌하셔야 함에도
몰락시키지 않은 것은
그 아비 다윗의 믿음 때문이었다고...말씀합니다
분명히 심판해야 함에도 아버지 다윗의 눈물 때문에 그 시대까지
보호함을 우리 앞에 드러냅니다.
솔로몬은 자기 때에는 나라가 건재하지만
아들 르호보암때에 그 나라가 비극적으로 나뉘어집니다.
북쪽은 우상숭배로 연연한 그 모든 역사 때문에 더 짙은 어둠의 터널로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들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북쪽은 풍요로운 땅이었지만 하나님을 도외시할 위험이 있다.
그들의 신앙이 왜곡되기 시작하지만
남방 유다를 가른 것은 그들이 너무나 어려운 환경
양을 치고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살 수 없는 땅
매 순간 하나님께 무릎 꿇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기에...
남방유다는 하나님 아니면 안 되는 상황이었기에 하나님만 바라본 상황
궁극적으로 이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삶을 살면서 크리스찬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고 무릎 꿇는가 하는 것이
인생의 어려움이 왔을 때 그 삶에 운명을 좌우합니다.
세상의 힘이 나의 인생을 풍요롭게 못합니다
우리를 도울 수 있는 진정한 힘 나를 회복하는 진정한 능력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한 켠으로 솔로몬의 범죄로 나라가 갈라지지만
그 이후에 남방유다를 보호하기 위해 부요한 북방에브라임과
철저하게 거리를 두게 합니다.
남방유다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부요한 북쪽 에브라임과 나뉘게 하심
북쪽은 쿠테타의 연속 왕정이 바뀌면서 백성들 앞에 통치력을 드러내기 위해
그들은 피부로 느끼는 부요함이 하나님께 무릎 꿇지 않고 세상과 야합하고
오므리 왕조는 세상과 연합하기 위해서 급급하고
이세벨에 의해 바알 숭배가 극렬하게 진행되어서 영적으로 가장 타락한 상황이 됩니다.
*아합왕 ㅡ 환경은 부요했지만 영적으로 가장 타락한 시대가 됩니다.
하나님이 이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통해
아합에게 회개치 않으면 이 땅이 피폐하게 될 것을 선언하지만
그러나 엘리야의 말을 듣지 않고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엘리야를 3년 반 동안
그릿 시냇가에서 보호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고
사르밧 과부에게 위탁하고 자기를 돕는 하나님의 손길을 의지합니다.
오직 하나님 절대주권과 그분의 공급을 의지하는 삶을 삽니다.
말씀이 멈추라 하면 멈추고 가라고 하면 갑니다
어떤 능력 배경 다 아니었습니다
말씀이 머무르라 하면 머무르고 가라고 하면 움직입니다
드디어 3년6개월 동안 환경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말씀을 신뢰하며
기도할 때 갈멜산에서 불로 응답 받는 기적!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이제 드디어 하나님의 영광, 통치가 회복될 줄 알았을 것입니다.
이 땅 가득히 우상숭배가 사라지고 하나님의 공의와 통치가 실현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는데 다음날은 여전히 이세벨의 칼 날이 있었습니다.
어제의 흥분 ,감동 , 역사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얼마나 감격하고 찬양했고 살아계심을 선포했는데
그러나.....
여전히 악의 세력은 제거되지 않고 오히려 그의 목숨을 위협하는 상황
그가 번 아웃 됩니다.
더 깊이 광야 속으로 도망가서 로뎀나무아래서 기진맥진하여
죽기를 구하는 상황이 됩니다.
왜 이런 상황이 되었을까요?
거룩한 땅으로 회복되는 것일텐데..
왜 여전히 악이 득세할까요?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의 좌절과 절망
저는 이 본문을 많이 다뤘는데
이 말씀 속에서 제 마음에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18장에서 불로 응답받는 현장 속에서 감동을 받았는데
그런데 오늘 본문이 더 제 마음에 짙게 와 닿았습니다
어제의 성공, 어제의 찬란한 영광이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그가 영적으로 피폐해져서 어제의 영광승리 다 잊고
하나님 내가 이런 가운데서도 여전히 적들 앞에 말씀으로 서겠습니다 하지 않고
‘나는 이제 족하오니 죽여주십시오’ 고백합니다.
이 내용이 너무나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이 말씀이 너무나 마음에 듭니다.
성공만 드러난다면 때로 우리가 실패할 때
성공의 화려함 뒤에 가려지고 비참해질 수 있는데
이 사람이 함부로 산 것도 아니고 우상 숭배한 것도 아닌데
불순종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주저앉았다면
이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성찰, 교훈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 ?
이렇게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응답을 경험했던 믿음의 사람에게도
왜 이런 인생의 아픔이 있었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 삶 속에 절망만이 아닌
우리 인생의 새로운 여명을 밝혀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그가 낙심하고 좌절했을까.
본문을 보면 하나님 앞에 항상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참 열심히 있었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하나님 말씀 앞에 무릎 꿇고 철저하게 순복하고
적들 앞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냈습니다.
고난을 관통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냈을때의 감동이 소중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가 진정 아합의 선지자가 되어서 그 시대를 이끌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대단한 명성을 얻고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낼 수 있었겠지만
사람이 빛날수록 하나님이 더 초라해지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엘리야의 모든 개혁과 능력은 감추어지고 현실앞에 주저앉지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하나님의 역사 능력을 확증하는 현장이 아닐까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내가’ 드러남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남아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영광스런 나라는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새로운 하늘과 땅이 온 우주에 완성되었을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면류관을 씌워주실 때
우리가 그 면류관을 내려놓고 주께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는 순간이
하늘나라의 완성이라는 것입니다
여전히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었음을 고백하는 것이
최고의 영광의 순간이란 사실입니다.
오직 은혜만 남게 하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명성만 남게 하십시오,
그것이 진정한 성공입니다.
높이 올라가서도 저는 은혜 아니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백해야 합니다.
내가 고난 중에 이렇게 인내하고 견디었더니 이렇게 성공했다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은혜 아니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백하는 것이
진정한 성공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합이 궁내 대신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크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일백 인을 가져
오십 인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었더라’(열왕기상18:3-4)
우린 불로 응답받은 위대한 사람 엘리야만 기억하지만
성경은 감춰진 인물 오바댜를 ‘여호와를 크게 경외한자라’ 평가합니다
제가 본문을 읽으며 생각한 것이
목사를 가르켜서 크게 여호와를 경외한자라 평가하지 않을 수 있겠구나
무대에 서는 사람일수록 스포트라이트가 꺼지는 순간
그냥 사라질 수 있겠구나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악으로 가득 차 있었고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 현실
저도 8개월 동안 삶도 고독했고 마음도 힘든 면이 있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예배당에서 주일을 맞이하고 새벽기도드리고
예전같으면 동역자들과 청년들과 비전트립 다니면서 비전을 제시하고
가르치고 그들과 함께 할 때 뭔가 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고
그들에게 공급하고 공급받으면서 저의 존재의 가치를 느끼고 했는데
지금은 다 사라진 상태로 보여집니다.
육체도 약하고 사역도 사라져 보이지만
남은 게 하나 있습니다.
저만 남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저만 남았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
나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왜 존재하는가?
제가 철저하게 무릎 꿇으면서 중요한건 하나님이 하시면 뭐든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다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는 누구일까?
목사도 이 땅에 유한한 교회가 존재하는 한 목사이지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천국에서도 하나님이 저를 박목사야 부르실까요 ?
‘사랑하는 아들아’...그렇게 부르실 것입니다
그때 역할은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엘리야만 기억하는데
성경은 그를 크게 평가하지 않고 죽기를 구하는 사람으로 전락합니다.
화려함이 다가 아니라 사람이 보기에 성공이 다가 아니다
하나님의 평가가 가장 중요하구나
오바댜는 알려지지 않은 자였지만 성경은 그를
여호와를 크게 경외하는자라 평가합니다.
세상은 비교하지만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의 절대적 가치로 보는 것입니다.
역할인 것입니다
역할이 사라지고 내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일까. ?
모세가 하나님 앞에 섭니다 나이 80이 되어서 섭니다.
우리가 코로나19 어려움을 통해 세상이 바뀌고 좋아지길 변하길 원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누구인가 ?
나를 바라봄이 가장 중요합니다
왜 교회가 왜 과격해질까요 ?
세상을 바꾸려고 하니까요
다 사라지고 ‘나는 누구인가’ 중요합니다.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기 위해 혈안 되어있는 상황
*왕상19:1-2
이세벨이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았기에 두려움도 없는자 입니다.
악인은 더 득세합니다.
엘리야를 대적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에 대해서 성찰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질문했어야 합니다.
*광야에서 죽기를 구하다!
*왕상19:3-4
*정체성을 역할에 두지 말라
*정체성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에 두라
정체성을 역할에 두지 않아야 합니다.
비가 오고 불이 떨어진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여전히 들려오는 말씀 나는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하고 신뢰할 때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전히 은혜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열심히 수고하고 헌신했지만
내가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다 고백하는 것은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드렸던 역동적인 예배.,감격 스런 예배를 드릴 수 있나요 ?
코로나19로 인해 .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약한 존재들이기에
오직 은혜로 서 있어야 합니다.
*삶의 성공은 규모가 아닌 순종이다.
오늘 어떤 역할 환경의 성취 성공 세상의 모든 스포트라이트에 관심 두지말고
오직 내게 베푸신 은혜 앞에 서야 합니다.
말씀이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성공이고
능력임을 확인하고 승리하는 삶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부 11시예배 ....
광야의 고통을 겪는 인생!(왕상19:1-8)
우리는 열왕기상 19장을 통해서 북방 에브라임의
가장 어두운 역사의 현장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의 가장 힘들었던 삶의 한복판을 바라보게 됩니다.
역사도 힘들고 어렵고 하나님의 사람의 인생도 가장 힘든
터널을 지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솔로몬 이후에 하나님의 주권과 공급에 대한 감격의 삶을 살았는데
솔로몬은 한동안은 듣는 마음도 있었고 순종했지만 이방 여인과의 결혼과 동시에
삶이 처절하게 무너집니다.
그의 처첩들이 우상 앞에 경배하는 만행들이 자행되면서
이스라엘은 몰락의 길로 접어듭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솔로몬을 징벌하셔야 함에도
몰락시키지 않은 것은
그 아비 다윗의 믿음 때문이었다고...말씀합니다
분명히 심판해야 함에도 아버지 다윗의 눈물 때문에 그 시대까지
보호함을 우리 앞에 드러냅니다.
솔로몬은 자기 때에는 나라가 건재하지만
아들 르호보암때에 그 나라가 비극적으로 나뉘어집니다.
북쪽은 우상숭배로 연연한 그 모든 역사 때문에 더 짙은 어둠의 터널로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들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북쪽은 풍요로운 땅이었지만 하나님을 도외시할 위험이 있다.
그들의 신앙이 왜곡되기 시작하지만
남방 유다를 가른 것은 그들이 너무나 어려운 환경
양을 치고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살 수 없는 땅
매 순간 하나님께 무릎 꿇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기에...
남방유다는 하나님 아니면 안 되는 상황이었기에 하나님만 바라본 상황
궁극적으로 이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삶을 살면서 크리스찬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고 무릎 꿇는가 하는 것이
인생의 어려움이 왔을 때 그 삶에 운명을 좌우합니다.
세상의 힘이 나의 인생을 풍요롭게 못합니다
우리를 도울 수 있는 진정한 힘 나를 회복하는 진정한 능력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한 켠으로 솔로몬의 범죄로 나라가 갈라지지만
그 이후에 남방유다를 보호하기 위해 부요한 북방에브라임과
철저하게 거리를 두게 합니다.
남방유다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부요한 북쪽 에브라임과 나뉘게 하심
북쪽은 쿠테타의 연속 왕정이 바뀌면서 백성들 앞에 통치력을 드러내기 위해
그들은 피부로 느끼는 부요함이 하나님께 무릎 꿇지 않고 세상과 야합하고
오므리 왕조는 세상과 연합하기 위해서 급급하고
이세벨에 의해 바알 숭배가 극렬하게 진행되어서 영적으로 가장 타락한 상황이 됩니다.
*아합왕 ㅡ 환경은 부요했지만 영적으로 가장 타락한 시대가 됩니다.
하나님이 이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통해
아합에게 회개치 않으면 이 땅이 피폐하게 될 것을 선언하지만
그러나 엘리야의 말을 듣지 않고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엘리야를 3년 반 동안
그릿 시냇가에서 보호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고
사르밧 과부에게 위탁하고 자기를 돕는 하나님의 손길을 의지합니다.
오직 하나님 절대주권과 그분의 공급을 의지하는 삶을 삽니다.
말씀이 멈추라 하면 멈추고 가라고 하면 갑니다
어떤 능력 배경 다 아니었습니다
말씀이 머무르라 하면 머무르고 가라고 하면 움직입니다
드디어 3년6개월 동안 환경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말씀을 신뢰하며
기도할 때 갈멜산에서 불로 응답 받는 기적!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이제 드디어 하나님의 영광, 통치가 회복될 줄 알았을 것입니다.
이 땅 가득히 우상숭배가 사라지고 하나님의 공의와 통치가 실현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는데 다음날은 여전히 이세벨의 칼 날이 있었습니다.
어제의 흥분 ,감동 , 역사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얼마나 감격하고 찬양했고 살아계심을 선포했는데
그러나.....
여전히 악의 세력은 제거되지 않고 오히려 그의 목숨을 위협하는 상황
그가 번 아웃 됩니다.
더 깊이 광야 속으로 도망가서 로뎀나무아래서 기진맥진하여
죽기를 구하는 상황이 됩니다.
왜 이런 상황이 되었을까요?
거룩한 땅으로 회복되는 것일텐데..
왜 여전히 악이 득세할까요?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의 좌절과 절망
저는 이 본문을 많이 다뤘는데
이 말씀 속에서 제 마음에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18장에서 불로 응답받는 현장 속에서 감동을 받았는데
그런데 오늘 본문이 더 제 마음에 짙게 와 닿았습니다
어제의 성공, 어제의 찬란한 영광이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그가 영적으로 피폐해져서 어제의 영광승리 다 잊고
하나님 내가 이런 가운데서도 여전히 적들 앞에 말씀으로 서겠습니다 하지 않고
‘나는 이제 족하오니 죽여주십시오’ 고백합니다.
이 내용이 너무나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이 말씀이 너무나 마음에 듭니다.
성공만 드러난다면 때로 우리가 실패할 때
성공의 화려함 뒤에 가려지고 비참해질 수 있는데
이 사람이 함부로 산 것도 아니고 우상 숭배한 것도 아닌데
불순종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주저앉았다면
이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성찰, 교훈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 ?
이렇게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응답을 경험했던 믿음의 사람에게도
왜 이런 인생의 아픔이 있었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 삶 속에 절망만이 아닌
우리 인생의 새로운 여명을 밝혀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그가 낙심하고 좌절했을까.
본문을 보면 하나님 앞에 항상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참 열심히 있었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하나님 말씀 앞에 무릎 꿇고 철저하게 순복하고
적들 앞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냈습니다.
고난을 관통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냈을때의 감동이 소중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가 진정 아합의 선지자가 되어서 그 시대를 이끌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대단한 명성을 얻고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낼 수 있었겠지만
사람이 빛날수록 하나님이 더 초라해지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엘리야의 모든 개혁과 능력은 감추어지고 현실앞에 주저앉지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하나님의 역사 능력을 확증하는 현장이 아닐까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내가’ 드러남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남아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영광스런 나라는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새로운 하늘과 땅이 온 우주에 완성되었을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면류관을 씌워주실 때
우리가 그 면류관을 내려놓고 주께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는 순간이
하늘나라의 완성이라는 것입니다
여전히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었음을 고백하는 것이
최고의 영광의 순간이란 사실입니다.
오직 은혜만 남게 하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명성만 남게 하십시오,
그것이 진정한 성공입니다.
높이 올라가서도 저는 은혜 아니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백해야 합니다.
내가 고난 중에 이렇게 인내하고 견디었더니 이렇게 성공했다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은혜 아니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백하는 것이
진정한 성공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합이 궁내 대신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크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일백 인을 가져
오십 인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었더라’(열왕기상18:3-4)
우린 불로 응답받은 위대한 사람 엘리야만 기억하지만
성경은 감춰진 인물 오바댜를 ‘여호와를 크게 경외한자라’ 평가합니다
제가 본문을 읽으며 생각한 것이
목사를 가르켜서 크게 여호와를 경외한자라 평가하지 않을 수 있겠구나
무대에 서는 사람일수록 스포트라이트가 꺼지는 순간
그냥 사라질 수 있겠구나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악으로 가득 차 있었고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 현실
저도 8개월 동안 삶도 고독했고 마음도 힘든 면이 있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예배당에서 주일을 맞이하고 새벽기도드리고
예전같으면 동역자들과 청년들과 비전트립 다니면서 비전을 제시하고
가르치고 그들과 함께 할 때 뭔가 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고
그들에게 공급하고 공급받으면서 저의 존재의 가치를 느끼고 했는데
지금은 다 사라진 상태로 보여집니다.
육체도 약하고 사역도 사라져 보이지만
남은 게 하나 있습니다.
저만 남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저만 남았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
나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왜 존재하는가?
제가 철저하게 무릎 꿇으면서 중요한건 하나님이 하시면 뭐든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다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는 누구일까?
목사도 이 땅에 유한한 교회가 존재하는 한 목사이지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천국에서도 하나님이 저를 박목사야 부르실까요 ?
‘사랑하는 아들아’...그렇게 부르실 것입니다
그때 역할은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엘리야만 기억하는데
성경은 그를 크게 평가하지 않고 죽기를 구하는 사람으로 전락합니다.
화려함이 다가 아니라 사람이 보기에 성공이 다가 아니다
하나님의 평가가 가장 중요하구나
오바댜는 알려지지 않은 자였지만 성경은 그를
여호와를 크게 경외하는자라 평가합니다.
세상은 비교하지만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의 절대적 가치로 보는 것입니다.
역할인 것입니다
역할이 사라지고 내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일까. ?
모세가 하나님 앞에 섭니다 나이 80이 되어서 섭니다.
우리가 코로나19 어려움을 통해 세상이 바뀌고 좋아지길 변하길 원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누구인가 ?
나를 바라봄이 가장 중요합니다
왜 교회가 왜 과격해질까요 ?
세상을 바꾸려고 하니까요
다 사라지고 ‘나는 누구인가’ 중요합니다.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기 위해 혈안 되어있는 상황
*왕상19:1-2
이세벨이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았기에 두려움도 없는자 입니다.
악인은 더 득세합니다.
엘리야를 대적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에 대해서 성찰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질문했어야 합니다.
*광야에서 죽기를 구하다!
*왕상19:3-4
*정체성을 역할에 두지 말라
*정체성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에 두라
정체성을 역할에 두지 않아야 합니다.
비가 오고 불이 떨어진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여전히 들려오는 말씀 나는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하고 신뢰할 때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전히 은혜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열심히 수고하고 헌신했지만
내가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다 고백하는 것은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드렸던 역동적인 예배.,감격 스런 예배를 드릴 수 있나요 ?
코로나19로 인해 .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약한 존재들이기에
오직 은혜로 서 있어야 합니다.
*삶의 성공은 규모가 아닌 순종이다.
오늘 어떤 역할 환경의 성취 성공 세상의 모든 스포트라이트에 관심 두지말고
오직 내게 베푸신 은혜 앞에 서야 합니다.
말씀이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성공이고
능력임을 확인하고 승리하는 삶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