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기자부
작성일
2018-02-18 19:01
조회
1130
2월 18일 주일 2, 3, 5부예배 ㅡ행복! (신명기 33:29)
행복! (신명기 33:29)
설을 맞아 서로 “복 많이 받으세요”란 말을 주고 받습니다.
70년대 한국 사회가 고도로 성장할 때 공교롭게도 한국 교회의 성장과 맞물렸습니다.
당시 교회 강단에서도 “여러분 복 받으세요”라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여기서 말한 복은 세상의 복과 연결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가?’하는 물음을 간과했습니다.
어떤 한국 기독사를 연구하는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국 교회가 갑자기 실추되는 이유는 잘못된 복에 대한 해석 때문이다.
교회 강단에서 말한 복을 받고 나니까 더 이상 하나님을 찾을 만한 명분이나 이유도 없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여기서 저는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여러분 복이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세상의 복, 가치관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지는 않습니까?
물론 환경적인 복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근본적인 복, 사라지지 않는 복,
영원한 것을 복이라 말씀합니다.
*알랭의 행복론
행복이란 스스로 만족하는 지점에 있다. 성공했기 때문에 행복하고 만족한 것이 아니라
행복하고 만족하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다.
행복하고 만족하면 그 사람은 이미 성공한 사람입니다.
패배의식이 있고 쫓기는 마음이 있으면 그 사람은 실패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환경, 조건을 다 복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참된 복 –누구와 함께 있는가?
다윗은 말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편 32:2)
다윗은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을 복이라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을 복이라 고백합니다. 왕권, 영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셨다!” 일평생 자신과 함께 하신 하나님을 복이라 인식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 ‘임마누엘’이란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 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복입니다.
팔복을 말할 때 환경적인 복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거기엔 하나님의 사람이 추구해야 할 목적과 가치만이 있습니다.
헬라 원문을 보면 “복이 있구나”라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복이 있구나 그 영혼이 가난한 자여.” 영혼이 가난하다는 말이 이해가 잘 안 될 수 있습니다.
영혼이 가난하다는 말은 절대 빈곤을 말합니다.
‘Domine Non Sum Dignus’ “하나님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신명기 33장 29절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선포하는 장면입니다.
광야 40년이 끝나갑니다. 1세대는 무너졌고 2세대가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가나안 정복을 앞둔 그들을 재무장시키는 것,
둘째는 시내산 언약을 다시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억하는 것은 굉장히 소중합니다. 망각은 기억의 반대말 정도가 아닙니다.
망각은 패역입니다. 악한 것입니다. 망각은 신앙의 무너짐입니다.
구원의 은혜, 인도하신 은혜를 기억하고 기억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출애굽의 역사, 광야의 현장을 기억하는 것이 그들의 복이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시편 16:2)
다윗은 자신이 누른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복으로 여깁니다.
“그들이 그 형제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은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심 같이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심이니라”(신명기 18:2) 레위사람들에게 기업이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친히 그들의 기업이 되심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목회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기업이 없습니다.
우리의 기업은 영원한 나라에 있습니다.
* 고달픈 광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현장
하나님의 임재는 법 괘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원망, 불평으로 지냅니다. 기억하기를 거부합니다.
망각은 불신앙입니다. 나를 상속자로 세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을 받을 자 뿐만 아니라 이미 복을 받은 자입니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신명기 7:6) 이것이 복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명하여 불러주시고 나를 구속해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인데 우리는 그것을 복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예배가 복을 위한 수단이 될 때가 있습니다.
예배는 복 받은 사람이 은혜에 대한 전인격적인 반응입니다.
나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영광을 올려드리고 입 맞추는 전인격적인 행위입니다.
예배는 뭔가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은혜에 대한 감사, 감격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스바냐 3:17) 나라를 빼앗겼고 아무것도 없는데 스뱌냐는 말합니다.
-하나님께 가장 소중한 것은?
하나님께 가장 소중한 것은 ‘나’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가장 존귀히 여기십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소중히 여기시는 것,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연결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질그릇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가 존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영광스러운 것은 그 안에 보배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가치 있게 만드는 것, 내 삶을 빛나게 만드는 것,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이것으로 충분하다. 더 이상 가질 수도 없고,
더 필요한 것도 없다.” -메이저 아이언 토마스-
누구로 충분합니까? 누구로 만족합니까? 우리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무엇이 당신의 인격을 빛나게 하는가? 당신의 권련인가? 소유인가? 아니다.
당신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도널드 맥컬로우-
이것이 우리의 가슴 속에서부터 선포되는 고백이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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