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기자부
작성일
2018-03-25 18:48
조회
916
3월25일 주일 2,3,5부예배
언약의 성취! (사도행전8: 26~40)
구속사란 범죄 한 나를 죄의 심판으로부터 건져내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기 위해 베푸시고 준비하신 구원 계획을 말합니다.
성경은 인간을 존귀하게 창조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말합니다.
인간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셨습니다.
창조의 목적은 사랑이었습니다. 인간은 사랑받기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존귀하다고 선언합니다. 존귀함은 사랑을 주고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 이것이 곧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 했습니다. 범죄는 윤리, 도덕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부정입니다. 인간은 오만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주권에 대해 도전했습니다. 절대적인 가치를 상대적인 가치로 바꾸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절대 가치를 부정했습니다.
신앙의 성숙은 내게 베푸신 은혜를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복 받기 위한 신앙생활은 나쁘지는 않지만 성숙하지는 않은 신앙입니다.
신앙이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것에 반응하는 삶입니다.
사랑을 아는 자는 거룩한 반응을 보입니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에 사무치는 것, 이것이 성숙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우리의 인격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구원은 죄로부터 건져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구원은 이것 외에 한 가지 더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입니다.
구원 얻는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 더 집중해야합니다.
구원에 합당한 열매가 드러나야 합니다.
그것은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임재 가운데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기에 죄를 간과하실 수 없습니다.
분명히 대가지불하셔야 합니다. 대가지불을 성경은 구속이라 말합니다.
구속은 죄에 대한 값을 치루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서 예수께서 희생하셨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죄의 문제 해결 외에도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의 가치입니다.
대가지불된 것이 바로 가치입니다. 나를 위해 예수의 생명이 지불되었다면
나의 가치는 예수의 가치입니다.
죄인인 인간에게 전혀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셨습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신앙입니다.
종교와는 다릅니다. 종교는 무엇을 얻기 위해 신을 감동시키려하는 것이지만,
신앙은 내게 주신 은혜에 감격하여 사는 것입니다.
예배는 ‘worth’와 ‘ship’의 합성어입니다.
예배는 가치를 부여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구약은 구원자가 올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복음서는 그 구원자가 오셨다는 것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다시 오실 예수까지 바라보는 신앙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의 말씀은 원시언약입니다.
범죄한 인간에게 하신 첫 번째 약속입니다. 구원자가 오실 것을 성경은 끊임없이 선포합니다. 여자의 후손은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에게 나신 예수를 가리킵니다.
*창세기 3장 21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인간은 범죄 한 후 자기 수치를 가리기 위해 무화과 잎으로 가립니다.
이것을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 의로 죄를 가릴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의 의를 입어야 우리의 수치가 덮힙니다. 이것을 구속사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
구속사는 누군가 대신 죽는 다는 것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가지불하기 위해서는
죄 없는 자의 피 흘림이 필요합니다.
*히브리서 10장 10절
모든 구속사의 완성은 예수의 몸을 단번에 십자가에 내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속사의 완성입니다.
구속사는 어떤 종교도 가지지 못하는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사도행전 8장 29~33절
700년 전에 예언된 기록을 빌립 집사가 이방인의 입을 통해 듣습니다.
이방인의 고백이 아주 귀합니다.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깨닫겠습니까...?”
솔직한 고백이고 은혜를 갈망하는 고백입니다.
‘하나님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 성령께서 가르쳐주시옵소서’
더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같은 말씀도 어제와 오늘이 다릅니다.
*사도행전 8장 34~35절
복음은 예수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빌립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목사를 통해 선포되는 말씀이 들려져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신실한 사람은 오늘 내게 주시는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설교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마르틴 루터-
“하나님은 자신의 음성이 사람을 통해 울려 퍼지도록 하기 위해
사람의 입과 혀를 구별하신다.” -장 칼뱅-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사도가 아닌 빌립의 복음을 듣고 이방인이 구원을 얻습니다.
*사도행전 8장 36절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초대 교회는 구원 받는 순간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예수의 기적을 보고 믿지 않았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라는 것,
복음을 증거 할 때 구원받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듣는 마음입니다.
오늘의 말씀에 대한 설렘이 있어야합니다.
듣는 마음이 없으면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매일 새로운 하나님의 임재, 나의 존귀함을 기억하는 고난 주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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