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기자부
작성일
2021-04-25 10:30
조회
2788
4월25일 주일 2, 3부현장예배ㅡ나와 같이 되기를!' (행26:24~29)
2부 9시 현장예배 & 온라인예배
3부 11시 현장예배& 온라인예배
나와 같이 되기를!' (행26:24~29)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가슴이 뛰는 현실을 경험하는 것이 그다지 많지 않은 듯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심장을 뛰게 만드는 ‘그 무엇’이 존재합니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슴이 뛰는 경험들
우리 영혼의 맥박이 뛰었으면 좋겠다 !
감동이 많았으면 좋겠다
인생의 역동적인 느낌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하게 됩니다.
제가 신학교 들어가서 처음 기도 모임을 하는데
그때 첫 번째 모임에서 일생일대의
기도 제목을 나눈 적이 있는데
모두 다양한 기도 제목을 내놓고 함께 기도하는데
그때 저는 기도 제목이 한가지였습니다
감동하며 살고 싶다는 것이었고 함께 한 동무들이
저를 위해 뜨겁게 기도해주었던 기억이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지금도
제 마음에 여전히 은혜를 베푸시고 감동하게 하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코로나가 오고 지난 1년간 홀로 본당을 지키며 기도하는데
그 시간이 참 좋았습니다. 많이 울었고 감사했습니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가슴 치며 울기도 하고
그 터널을 지나는 시간이 제게는 참 새로운 현장이었습니다
신학교 시절 그 기도 제목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 다시 감동하고 싶습니다.’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이 어둠의 터널 속에서
감동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게 그 마음을
다시 불러일으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힘든 시간을 지나오면서
제 안에 뭔가 불타오르는 감동,
그것이 삶의 동력이 되어 지금까지 이끌어주었습니다.
그 은혜가 제 마음에 차곡차곡 쌓여져 왔습니다
결코 노쇠하지 않고 주저앉지 않는 영성이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주님 때문에 뛰는 가슴으로
서 있는 사람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바울이 있습니다.
구원의 감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좌절이나 절망은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힘을 가진 사람들 앞에서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모습이 담대합니다
현실은 사슬에 묶여있는데 권력자들 앞에서도
당당한 한 사람!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만나는
세상 사람들의 유형
본문에 보면 세 사람의 반응이 드러납니다.
*1.총독 베스도
바울이란 사람을 재판할 때 자신에게 어떤 책임이나
문제가 돌아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재판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강력하게 그 앞에서 복음을 증거합니다.
*행26:23--어떤 상황에서도 복음을 증거 하는 바울
자신에게 주어진 최후의 변론 시간에
오직 복음만을 전하고 있는 사도바울.
나 역시 여러분과 같이 예수를 핍박하던 자였는데
다메섹 도상에서 자신에게 임한 강력한 빛 때문에
시력을 잃게 되었고 내면의 눈을 뜨게 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된 사건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행26:24--“네가 미쳤구나”
베스도뿐 아니라 헤롯 아그립바에게도 전달되기에
급하게 내뱉은 말입니다.
진리를 가로막고자 하는 그의 행동이었습니다
세상은 신념과 열정을 가진 사람들에게 미쳤다라는
말을 자주 하곤 합니다.
크리스천들은 예수님 믿을 때 ‘미쳤다’라는 소리는
듣고 살아도 좋을 듯 싶습니다.
내가 예수 믿는 것이 세상 속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미쳤다는 말을 한 번이라도 듣지 못하고 산다면
제대로 사는 크리스천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헤롯 아그립바2세
20대 후반의 젊은 왕인데 처음에는 거부하고
냉담한 척 하지만 뭔가 마음속에 울림이 있던 자로
유대의 역사, 사상, 모든 현장을 알고 있던 자입니다.
이 사람을 향해서도 바울이
그분의 십자가 죽으심, 승천, 재림도 다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증거 합니다.
*행26:26-27-“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행26:28--냉담한 왕의 반응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사도바울의 복음 증거를 통해 뭔가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을 마주하게 되었음에도 자신의 마음으로
절제하는 유형으로 반응을 보입니다.
세상이 무엇이라 하든지 자기 멋에 사는 여자였습니다
이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관심을 보이지 않는
자기중심적인 삶을 사는 사람..
어떤 상황에 대해 전혀 관심 없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만나게 되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
1)편견과 오해로 인해 도전적으로 나오는 사람들
2)일말의 관심은 가지는 듯하지만 나중에는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3)아예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 사람들
*어떤 유형의 사람이든지 똑같은 형편
*행26:18--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지금 바울이 그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영적 시각 장애인이다.
과거 나도 그랬다. 부활의 주님이 당신들에게
역사하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성령의 빛이 임하여서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비춰주셔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들은 영적 시각 장애인이었습니다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임이 분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처한 형편
*복음 증거를 통해서 예수를 믿으면 주어지는 신분
*18절--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 기업을 얻게 하리라
*바울의 심정을 배우라!
그들이 바울을 핍박할 때
바울이 외칩니다.
*29절--“내가 쇠사슬에 매인 것 외에는 당신들
모두가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바울의 가슴속에서 불꽃처럼 타오르는
열정의 근거는?
1)구원의 감격
무엇이 바울의 가슴에 이런 자긍심을 불러 왔나요?
바로 나 같은 죄인이 구원 얻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그 감격이 주눅 들지 않고 복음 전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삶을 살아가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2)거룩한 자존감
천막 교회 때 온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긍심과 자존감으로 가득했기에
큰 교회에서 부흥회 하면 동역자들과 함께 참석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기가 죽습니까?
바울 그에게도 거룩한 자존감이 존재했습니다.
자신이 처한 현실에 휘둘리지 않고 바울은
거룩한 자존감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사도 됨을 당당하게 선언합니다.
오만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훗날 제가 죽으면 묘비명에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문구를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일 년 동안 기도하면서
문득 나의 정체성을 좀 더 명확하게 표현하는 말로 바꿔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나태주 시인의 책을 봤는데,
그는 자기의 묘비에 이렇게 새겨놓는다고 하더군요,
‘정말 많이 보고 싶겠지만 조금만 참아요’ 라는.,..
시인다운 표현입니다.
만만치 않은 인생에서 나의 족적을 어떻게 남길까?
우리의 자긍심을 어떻게 남겨놓을까.
고민해보게 됩니다.
*히9:27--‘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말씀합니다
부유한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그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사람은 언제인가 죽어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무엇이 나의 인생의 가장 강력한 자긍심입니까?
히스기야는 54세에 죽습니다.
스물다섯에 왕이 되어서 29년 동안 통치합니다.
그가 죽을병에 걸렸을 때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의 생명을
15년 연장시켜 주었는데 그 마지막 15년 동안
성경은 그가 ‘교만해졌다’고 말합니다. 참 아쉽습니다.
언젠가는 끝나는 인생,
하나님 앞에 제대로 사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3)연민의 마음 ㅡ믿지 않는 자들을 향한 연민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인생에 있어서 ‘감격의 동력’은 무엇입니까?
내 자긍심의 동력은 무엇입니까?
세상을 향해 연민을 품을 수 있는 동력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서. 언젠가는 인생의 마지막을 경험할 것입니다.
죽을병에서 고침받아도 사람은 언제인가 죽습니다.
나사로도 죽은 지 나흘 만에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난 기적도 영원히 살지 않고
육체는 언제인가 죽습니다
항상 우리가 끝이 있음을 기억하고 무릎으로
살아야 합니다.
나의 삶의 동력은 무엇입니까?
무엇으로 삽니까?
1년이 넘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너무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똑같은
‘갇혀있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나를 감격으로
이끌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여러분에게 그 감격의 동력이
여러분 안에서 다시 한 번 확증되고 선언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부 11시 현장예배& 온라인예배
나와 같이 되기를!' (행26:24~29)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가슴이 뛰는 현실을 경험하는 것이 그다지 많지 않은 듯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심장을 뛰게 만드는 ‘그 무엇’이 존재합니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슴이 뛰는 경험들
우리 영혼의 맥박이 뛰었으면 좋겠다 !
감동이 많았으면 좋겠다
인생의 역동적인 느낌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하게 됩니다.
제가 신학교 들어가서 처음 기도 모임을 하는데
그때 첫 번째 모임에서 일생일대의
기도 제목을 나눈 적이 있는데
모두 다양한 기도 제목을 내놓고 함께 기도하는데
그때 저는 기도 제목이 한가지였습니다
감동하며 살고 싶다는 것이었고 함께 한 동무들이
저를 위해 뜨겁게 기도해주었던 기억이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지금도
제 마음에 여전히 은혜를 베푸시고 감동하게 하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코로나가 오고 지난 1년간 홀로 본당을 지키며 기도하는데
그 시간이 참 좋았습니다. 많이 울었고 감사했습니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가슴 치며 울기도 하고
그 터널을 지나는 시간이 제게는 참 새로운 현장이었습니다
신학교 시절 그 기도 제목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 다시 감동하고 싶습니다.’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이 어둠의 터널 속에서
감동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게 그 마음을
다시 불러일으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힘든 시간을 지나오면서
제 안에 뭔가 불타오르는 감동,
그것이 삶의 동력이 되어 지금까지 이끌어주었습니다.
그 은혜가 제 마음에 차곡차곡 쌓여져 왔습니다
결코 노쇠하지 않고 주저앉지 않는 영성이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주님 때문에 뛰는 가슴으로
서 있는 사람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바울이 있습니다.
구원의 감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좌절이나 절망은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힘을 가진 사람들 앞에서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모습이 담대합니다
현실은 사슬에 묶여있는데 권력자들 앞에서도
당당한 한 사람!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만나는
세상 사람들의 유형
본문에 보면 세 사람의 반응이 드러납니다.
*1.총독 베스도
바울이란 사람을 재판할 때 자신에게 어떤 책임이나
문제가 돌아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재판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강력하게 그 앞에서 복음을 증거합니다.
*행26:23--어떤 상황에서도 복음을 증거 하는 바울
자신에게 주어진 최후의 변론 시간에
오직 복음만을 전하고 있는 사도바울.
나 역시 여러분과 같이 예수를 핍박하던 자였는데
다메섹 도상에서 자신에게 임한 강력한 빛 때문에
시력을 잃게 되었고 내면의 눈을 뜨게 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된 사건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행26:24--“네가 미쳤구나”
베스도뿐 아니라 헤롯 아그립바에게도 전달되기에
급하게 내뱉은 말입니다.
진리를 가로막고자 하는 그의 행동이었습니다
세상은 신념과 열정을 가진 사람들에게 미쳤다라는
말을 자주 하곤 합니다.
크리스천들은 예수님 믿을 때 ‘미쳤다’라는 소리는
듣고 살아도 좋을 듯 싶습니다.
내가 예수 믿는 것이 세상 속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미쳤다는 말을 한 번이라도 듣지 못하고 산다면
제대로 사는 크리스천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헤롯 아그립바2세
20대 후반의 젊은 왕인데 처음에는 거부하고
냉담한 척 하지만 뭔가 마음속에 울림이 있던 자로
유대의 역사, 사상, 모든 현장을 알고 있던 자입니다.
이 사람을 향해서도 바울이
그분의 십자가 죽으심, 승천, 재림도 다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증거 합니다.
*행26:26-27-“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행26:28--냉담한 왕의 반응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사도바울의 복음 증거를 통해 뭔가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을 마주하게 되었음에도 자신의 마음으로
절제하는 유형으로 반응을 보입니다.
- 버니게
세상이 무엇이라 하든지 자기 멋에 사는 여자였습니다
이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관심을 보이지 않는
자기중심적인 삶을 사는 사람..
어떤 상황에 대해 전혀 관심 없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만나게 되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
1)편견과 오해로 인해 도전적으로 나오는 사람들
2)일말의 관심은 가지는 듯하지만 나중에는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3)아예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 사람들
*어떤 유형의 사람이든지 똑같은 형편
*행26:18--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지금 바울이 그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영적 시각 장애인이다.
과거 나도 그랬다. 부활의 주님이 당신들에게
역사하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성령의 빛이 임하여서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비춰주셔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들은 영적 시각 장애인이었습니다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임이 분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처한 형편
*복음 증거를 통해서 예수를 믿으면 주어지는 신분
*18절--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 기업을 얻게 하리라
*바울의 심정을 배우라!
그들이 바울을 핍박할 때
바울이 외칩니다.
*29절--“내가 쇠사슬에 매인 것 외에는 당신들
모두가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바울의 가슴속에서 불꽃처럼 타오르는
열정의 근거는?
1)구원의 감격
무엇이 바울의 가슴에 이런 자긍심을 불러 왔나요?
바로 나 같은 죄인이 구원 얻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그 감격이 주눅 들지 않고 복음 전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삶을 살아가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2)거룩한 자존감
천막 교회 때 온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긍심과 자존감으로 가득했기에
큰 교회에서 부흥회 하면 동역자들과 함께 참석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기가 죽습니까?
바울 그에게도 거룩한 자존감이 존재했습니다.
자신이 처한 현실에 휘둘리지 않고 바울은
거룩한 자존감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사도 됨을 당당하게 선언합니다.
오만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훗날 제가 죽으면 묘비명에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문구를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일 년 동안 기도하면서
문득 나의 정체성을 좀 더 명확하게 표현하는 말로 바꿔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나태주 시인의 책을 봤는데,
그는 자기의 묘비에 이렇게 새겨놓는다고 하더군요,
‘정말 많이 보고 싶겠지만 조금만 참아요’ 라는.,..
시인다운 표현입니다.
만만치 않은 인생에서 나의 족적을 어떻게 남길까?
우리의 자긍심을 어떻게 남겨놓을까.
고민해보게 됩니다.
*히9:27--‘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말씀합니다
부유한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그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사람은 언제인가 죽어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무엇이 나의 인생의 가장 강력한 자긍심입니까?
히스기야는 54세에 죽습니다.
스물다섯에 왕이 되어서 29년 동안 통치합니다.
그가 죽을병에 걸렸을 때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의 생명을
15년 연장시켜 주었는데 그 마지막 15년 동안
성경은 그가 ‘교만해졌다’고 말합니다. 참 아쉽습니다.
언젠가는 끝나는 인생,
하나님 앞에 제대로 사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3)연민의 마음 ㅡ믿지 않는 자들을 향한 연민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인생에 있어서 ‘감격의 동력’은 무엇입니까?
내 자긍심의 동력은 무엇입니까?
세상을 향해 연민을 품을 수 있는 동력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서. 언젠가는 인생의 마지막을 경험할 것입니다.
죽을병에서 고침받아도 사람은 언제인가 죽습니다.
나사로도 죽은 지 나흘 만에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난 기적도 영원히 살지 않고
육체는 언제인가 죽습니다
항상 우리가 끝이 있음을 기억하고 무릎으로
살아야 합니다.
나의 삶의 동력은 무엇입니까?
무엇으로 삽니까?
1년이 넘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너무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똑같은
‘갇혀있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나를 감격으로
이끌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여러분에게 그 감격의 동력이
여러분 안에서 다시 한 번 확증되고 선언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