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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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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1 07:56
조회
1739
2월 21일 1부 ㅡ 5부 온라인예배 & 현장예배
7시 ......1부 온라인예배 & 현장예배
예배가 끝나고 목사님과 사모님께서
실버아카데미 어르신들에게
마스크를 ( 일주일분 )
나눠드리고 있습니다.
9시..... 2부 온라인예배 & 현장예배
은혜의공동체를 대신하여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동역자 모두에게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라고 말씀하시는 목사님...
3부...... 11시 온라인예배 & 현장예배
2시 .....5부 청년부예배
'야망에서 생명으로!'(행9:1~9)
여기 한 야망가가 있습니다.
야망의 소리와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서 많은 크리스찬들을 잔해했던 한 야망가의 모습이 본문에 드러납니다.
바로 ‘사울’입니다. 철저하게 야망으로 가득 찬 그는 마음의 문을 닫고
오로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사람의 생명도 함부로 대하는 ‘율법주의자’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을 향한 사랑을 선언하는 것이 진정한 율법인데
사울의 삶은 그야말로 ‘광신자’였습니다
신명기 6장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의 하나님 여호와는 유일하신 분이시니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율법의 선언이라면 예수님께서는 여기에 하나 더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웃사랑이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순복하는 삶을 살 뿐 아니라
사람을 향한 수평적인 섬김과 희생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성경은 항상 말씀합니다.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도 사람을 향한 아주 참혹한 만행을 자행했습니다.
스테반집사의 순교에 앞장섰을 뿐 아니라 수많은 크리스찬들을 잔해하기 위해서 자기의 모든 힘과 열정을 쏟아 부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 5절)에서는 회심 후 그의 고백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5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립보서 3:5-6)
그에게는 자신의 혈통과 가문에 대한 ‘자긍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 이 자긍심은 과격한 폭력과 사람을 향한 그의 광분,
즉 사람에 대한 연민도 사랑도 없는 그저 크리스찬들은 모두 박멸의 대상으로만 여기던
‘광신자’의 모습으로 드러날 뿐이었습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인애와 호의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헛된 열심이었고 야망을 향한 사울의 집착이었습니다.
그 모습은 갈라디아서 1장을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갈라디아서 1:13-14)
바울은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라며 ‘폭력자, 광신자’였던
회심 전 자신의 과거를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자신을 누군가에게 설명할 때 드러내는
‘솔직한 고백’의 현장입니다. 그는 모든 크리스찬들을 잔해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앞뒤 가리지 않고 서슴없이 다메섹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의 가슴 속에는 교회에 대한 분노와 위협뿐
아니라 믿는 자 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해치겠다는 잘못된 열정과 과격함이 드러납니다.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쌔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사도행전 8:3)
오로지 자신의 야망과 왜곡된 신념 때문에 수많은 크리스찬을 인간 이하로
취급했습니다. 진정한 율법주의자라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인간을 사랑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 열심과 율법주의자라는 것에
자긍심을 가질 뿐 자신이 오히려 율법을 짓밟는 광신자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들려 오는 음성 : 하나님의 임재와 부르심
이제 하나님이 사울의 운명속에 직접 개입하시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임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나는 어떤 존재가 됐을것인가’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데 그는 앞장섰습니다.
예루살렘을 철저하게 짓밟았습니다. 많은 사람을 죽이고 옥에 넘겨주는 일에
그는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사용했습니다. 그렇게 함부로 살며 만행을
저지르면서도 그것을 옳다 여기는 자체가 위험한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 깨닫지 못한 채 달려가는 그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삶 속에 운명적으로개입하기 시작하십니다.
4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사도행전 9:3-4)
강력한 빛이 임하고 땅에 엎드러져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주의 임재가 그의 삶 속에 운명처럼 임한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사람을 부르시는 하나님’을 보게됩니다.
범죄한 아담을 하나님은 부르십니다. 아담이 그 부르심에 자신의 죄를
깨닫고 철저하게 토설하며 돌이켰다면 어땠을까?
그러나 아담은 자신의 죄를 은폐하고 도리어 항변했고 그 결과로
인간의 죄는 무섭게 모든 인류의 생명속에 파급되었습니다.
아브라함도 부르셨습니다. 그를 저 갈대아 우르 에서 부르셨고
나중에는 모리아산에서 다급하게 부르십니다.
첫 번째 부르심은 소명을 주시는 ‘콜링(Calling)이었고
두 번째 모리아 땅에서의 부르심은 그의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애틋한 선언이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데 네 독자의 이삭도 아끼지 않는구나!‘하며
그를 만류하시는 부르심이었습니다.
또한 모세를 향한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40년 동안 밤에 양을 치면서 인생의 절망과 회의에 빠져 있던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꺼지지 않는 불꽃 앞에서 부르십니다.
그것은 새로운 사명과 비전을 주시는 하나님의 임재였습니다.
또 엘리야가 지쳐 죽기를 구할 때 하나님은 사자를 통해서
그를 어루만지시고 힘을 주시지만 호렙산에서 그에게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엘리야야 네가 왜 여기 있느냐 ! ’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오늘 본문에도 크리스찬을 압박하고 잔해하러 가는 핍박자 사울을 향해
강한 빛과 음성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놀라운 부르심이 등장합니다.
사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도 사울을 부르신 그 하나님의 임재와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이 은혜를 기억하고 살아갑니까 ?
돌아보면 그러한 부르심의 현장이 한 번쯤은 존재할 겁니다.
내 어두운 영혼속에 진리의 빛을 비추셔서
십자가에서 날 위해 죽으신 예수가 구원자이심을 깨닫고 믿게 하셔서
하나님의 주권을, 그분이 나의 아버지 되심을 고백하게 하시는
그 현장이 분명히 존재했다면 내 영혼 속에 그 진리의 빛과 음성이 들렸던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만큼 그 임재의 은혜를 기억하며 살아왔고 살고 있습니까.
신앙의 연조나 공로만 남아있다면 우리는 참으로 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신명기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기억하라’고
그렇게도 당부하셨나 봅니다. 기억하지 않으면 우리는 현실과
금방 타협하기 쉽고 하나님과 멀어지기 쉬운 그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회심 후 바울은 두고두고 ‘이 현장’을 기억하고 삽니다.
핍박을 당할 때도 훗날 누군가 앞에서 복음을 증거할 때도 시간만 되면
기가 막힌 현실을 수많은 사람들, 특히 자신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조차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여러분이 나를 핍박하는 것은 예수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도 예전에 여러분과 똑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여러분처럼 광신자였고 복음에 극렬한 대적자였는데,
내게 은혜의 빛이 비춰서 이렇게 변화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그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비추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라고 간증합니다.
이 간증은 시간이 지나도 그 내용이 더해지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는 간증의 위험성은 회를 거듭할수록 간증의 내용이
부풀려져 본질보다 커진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만 남아야 하는데
그 보다는 자신의 공로와 열심이 더욱 크게 남아 자기 자랑만이
될 수 있습니다. 진정한 간증은 시간이 지나도
그 현장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자신을 박해하는 군중들 앞에서....
8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사도행전 22:3-8)
바울은 핍박을 당하는 지금 청중들 앞에서 과시할 것도 많은데
왜 과거 다메섹에서 경험했던 그 빛과 음성에 대한 고백을 할까요?
자신도 그 임재의 현장이 아니었다면 지금 자신을 향해서 돌을 던지는
청중, 당신들과 다를 바가 없는 아니, 오히려 더욱더 광포한 주동자였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자신의 과거와 오늘의 모습을 통해
‘은혜’아니면 불가능했다는 것을 솔직하게 토로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훗날 가이사랴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가이사랴의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2세 분봉왕 앞에서
재판을 받는 최후 진술에서
15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사도행전 26:9-15)
*바울의 가슴속에 큰 울림으로 기억되는 감동의 현장
바울의 마지막 최후변론에서 고백했던 것은 바로 ‘다메섹 사건’이었습니다.
빛 속에서 들려온 음성, 나사렛 예수 그분이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그분이 십자가에 죽은 나사렛 예수이시며 또 다시 사시고
승천하신 나사렛 예수라는 것을 가감없이 증거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또 기억하고 기억합니다. 그에게는 큰 울림의 현장이 많았습니다.
그만큼 많은 간증거리가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기회만 주어지면
바울은 자신이 핍박자였다는 것, 철저하게 대적자였다는 것과
그러한 그의 가슴에 빛이 비춰지고 음성이 들려져서 삶이
변화되었고 가망이 없는 존재였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그의 가슴에 가장 크게 울리는 울림이었습니다.
우리 가슴에는 과연 어떤 울림이 있습니까.
과거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졌다면 그 음성을 들었던 나의 어떤 자랑,
나의 우월함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와 사랑 때문에
내가 여기 있다는 것에 대한 깊은 성찰이 과연 얼마큼 우리에게 존재합니까.
기억하고 사는 것, 은혜 아니면 안 된다는 것,
이것이 신앙이며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그 은혜를 여전히 기억하고
살지 않으면 우리는 공로 주의자가 되고 맙니다.
은혜, 하나님의 그 사랑 아니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40년을 유랑 생활할 때 하나님은 매일매일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날마다 만나를 공급하시고
목이 마르면 반석에서 생수가 터져나오게 하셨고
더울 때는 구름 기둥이 덮어주었고 추울 때는 불기둥이 따스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기는커녕 끊임없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항변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참 기적 같은 모습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같은 삶을 살면서도 그 은혜를 모르고
대적했으니 말입니다. 이것은 단연 어리석고 극단적인 이스라엘만의 상황은
아닙니다. 오늘, 나도 그럴 수 있습니다. 은혜로 살아왔고
그 은혜로 살아왔으면서도 여전히 말로는 은혜인데, 공로와 자신의 가치에 따라 살 때가 많습니다.
신앙 경력으로 나름대로 인생의 다양한 나눌 이야기들은 많은데 안 들리고
못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안 들려서 예배가 끝난 후에
‘내가 뭘 들었지’ 한다면......
은혜로 사는 우리가 은혜를 여전히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이 ‘경력’뿐이라면 이것이 가장 위험한 것입니다,
*그 모든 이적보다 더 놀라운 것은 한 영혼 속에 나타나는 구원의 역사
가장 큰 이적은 우리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 구원의 역사입니다.
가장 큰 하나님의 역사는 나 같은 죄인을 구속하시고
내 안에 성령이 임하셔서 예수를 주로 믿는 이 놀라운 은총을
경험케 하시는 것입니다. 은혜 아니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고
내가 믿을 수 있는 존재도 아니라는 것, 은혜 아니면
이 자리까지 올 수도 없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어떤 이적보다도 한 영혼의 전 삶 속에 나타나는 하나의 구원역사,
하나님의 구원의 모든 계획, 이것이 기적입니다.
그것을 기억할 때마다 우리 가슴 속에는 감동이 존재합니다.
감동은 어떤 사건에 대하여 감사를 느끼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찬들은 마땅히 하나님의 구원 사건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전 인격적으로 매 순간 감사하는 존재여야만 합니다.
바울은 이것으로 삽니다. 우리와 다른 성령의 강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날마다 그 구원의 감동을 경험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수십 년 전, 핍박자였던 과거 그 현장을 여전히 기억하고
그런 자신에게 빛이 임해 굴복시켰고 들려온 그 음성으로 인생이
변화되었다는 것,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나도 저들과 똑같은
사람이었을 거라는 것을 마치 오늘 경험한 것 마냥
그에게는 여전히 생생한 감동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 감동이 삶을 살아가게 하는 하나의 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사람들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초자연적인 어떤 세계를
보게하고 남들이 모르는 신비한 것을 경험하게 하시기도 하지만
진정한 성령의 역동성은 나 같은 죄를 구속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동의 마음을 끊임없이 갖게 하시고
그 사랑에 대해 응답하도록 도우신다는 사실입니다.
* 바울의 인생 후반부의 고백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디모데전서 1:12-15)
인생 후반부의 고백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충성했기 때문에 맡기신 것이 아니다. 대적자요 핍박자였음에도
나를 충성되이 여기셔서 직분을 맡기셨다’
그의 고백에는 그 은혜에 대한 감동만이 존재할 뿐 그 어떤 자랑도
공로도 없습니다. 바울에게는 기적 같은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기억하고 또 기억하고 순교의 제물이 되기 직전까지 일평생을
기억하고 삽니다. 죄인 중의 괴수지만 은혜로 순복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앞에 감동하는 삶을 살도록 도우시는 놀라우신
은총에 대한 사무침만이 존재합니다.
*오늘도 들려오는 음성이 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바울을 비춘 그 빛이 우리 가슴에 임해야 하고
그 음성이 들려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저 종교인일 뿐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배가 회복되길 기도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있는 곳에서
빛이 비춰지고 음성이 들리지 않으면 ’예배가 회복되었으면 하는 바램‘도
하나의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린다 해도 하나님을 사모하며 우리 속에 임하는 빛이
느껴져야 하며 전 인격 속에 들려오는 음성이 있어야 합니다.
수십 년이 지나도 나 같은 죄인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호의와, 사랑,
그 은혜 아니면 나는 정말 죄인의 괴수였다는 것,
또 나로 하여금 이렇게 철저하게 인생의 방향을 바꾸게 하시고
은혜 앞에 살도록 인도하셨다는 것을
기억하고 감동하며 사는 것이 크리스찬의 진정한 삶의 모습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여전히 그 음성이 들려져야 하고 성령의 빛이 비춰져야합니다.
우리 안에 그러한 갈망과 삶을 하나하나 돌아볼 때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위대한 구원의 현장을 통해서
매 순간 감동할 수 있고 오늘의 현실이 아무리 각박하고
어렵더라도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 소망이
우리 안에 날마다 다시 한 번 채워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7시 ......1부 온라인예배 & 현장예배
예배가 끝나고 목사님과 사모님께서
실버아카데미 어르신들에게
마스크를 ( 일주일분 )
나눠드리고 있습니다.
9시..... 2부 온라인예배 & 현장예배
은혜의공동체를 대신하여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동역자 모두에게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라고 말씀하시는 목사님...
3부...... 11시 온라인예배 & 현장예배
2시 .....5부 청년부예배
'야망에서 생명으로!'(행9:1~9)
여기 한 야망가가 있습니다.
야망의 소리와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서 많은 크리스찬들을 잔해했던 한 야망가의 모습이 본문에 드러납니다.
바로 ‘사울’입니다. 철저하게 야망으로 가득 찬 그는 마음의 문을 닫고
오로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사람의 생명도 함부로 대하는 ‘율법주의자’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을 향한 사랑을 선언하는 것이 진정한 율법인데
사울의 삶은 그야말로 ‘광신자’였습니다
신명기 6장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의 하나님 여호와는 유일하신 분이시니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율법의 선언이라면 예수님께서는 여기에 하나 더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웃사랑이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순복하는 삶을 살 뿐 아니라
사람을 향한 수평적인 섬김과 희생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성경은 항상 말씀합니다.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도 사람을 향한 아주 참혹한 만행을 자행했습니다.
스테반집사의 순교에 앞장섰을 뿐 아니라 수많은 크리스찬들을 잔해하기 위해서 자기의 모든 힘과 열정을 쏟아 부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 5절)에서는 회심 후 그의 고백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5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립보서 3:5-6)
그에게는 자신의 혈통과 가문에 대한 ‘자긍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 이 자긍심은 과격한 폭력과 사람을 향한 그의 광분,
즉 사람에 대한 연민도 사랑도 없는 그저 크리스찬들은 모두 박멸의 대상으로만 여기던
‘광신자’의 모습으로 드러날 뿐이었습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인애와 호의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헛된 열심이었고 야망을 향한 사울의 집착이었습니다.
그 모습은 갈라디아서 1장을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갈라디아서 1:13-14)
바울은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라며 ‘폭력자, 광신자’였던
회심 전 자신의 과거를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자신을 누군가에게 설명할 때 드러내는
‘솔직한 고백’의 현장입니다. 그는 모든 크리스찬들을 잔해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앞뒤 가리지 않고 서슴없이 다메섹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의 가슴 속에는 교회에 대한 분노와 위협뿐
아니라 믿는 자 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해치겠다는 잘못된 열정과 과격함이 드러납니다.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쌔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사도행전 8:3)
오로지 자신의 야망과 왜곡된 신념 때문에 수많은 크리스찬을 인간 이하로
취급했습니다. 진정한 율법주의자라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인간을 사랑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 열심과 율법주의자라는 것에
자긍심을 가질 뿐 자신이 오히려 율법을 짓밟는 광신자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들려 오는 음성 : 하나님의 임재와 부르심
이제 하나님이 사울의 운명속에 직접 개입하시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임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나는 어떤 존재가 됐을것인가’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데 그는 앞장섰습니다.
예루살렘을 철저하게 짓밟았습니다. 많은 사람을 죽이고 옥에 넘겨주는 일에
그는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사용했습니다. 그렇게 함부로 살며 만행을
저지르면서도 그것을 옳다 여기는 자체가 위험한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 깨닫지 못한 채 달려가는 그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삶 속에 운명적으로개입하기 시작하십니다.
4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사도행전 9:3-4)
강력한 빛이 임하고 땅에 엎드러져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주의 임재가 그의 삶 속에 운명처럼 임한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사람을 부르시는 하나님’을 보게됩니다.
범죄한 아담을 하나님은 부르십니다. 아담이 그 부르심에 자신의 죄를
깨닫고 철저하게 토설하며 돌이켰다면 어땠을까?
그러나 아담은 자신의 죄를 은폐하고 도리어 항변했고 그 결과로
인간의 죄는 무섭게 모든 인류의 생명속에 파급되었습니다.
아브라함도 부르셨습니다. 그를 저 갈대아 우르 에서 부르셨고
나중에는 모리아산에서 다급하게 부르십니다.
첫 번째 부르심은 소명을 주시는 ‘콜링(Calling)이었고
두 번째 모리아 땅에서의 부르심은 그의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애틋한 선언이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데 네 독자의 이삭도 아끼지 않는구나!‘하며
그를 만류하시는 부르심이었습니다.
또한 모세를 향한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40년 동안 밤에 양을 치면서 인생의 절망과 회의에 빠져 있던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꺼지지 않는 불꽃 앞에서 부르십니다.
그것은 새로운 사명과 비전을 주시는 하나님의 임재였습니다.
또 엘리야가 지쳐 죽기를 구할 때 하나님은 사자를 통해서
그를 어루만지시고 힘을 주시지만 호렙산에서 그에게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엘리야야 네가 왜 여기 있느냐 ! ’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오늘 본문에도 크리스찬을 압박하고 잔해하러 가는 핍박자 사울을 향해
강한 빛과 음성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놀라운 부르심이 등장합니다.
사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도 사울을 부르신 그 하나님의 임재와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이 은혜를 기억하고 살아갑니까 ?
돌아보면 그러한 부르심의 현장이 한 번쯤은 존재할 겁니다.
내 어두운 영혼속에 진리의 빛을 비추셔서
십자가에서 날 위해 죽으신 예수가 구원자이심을 깨닫고 믿게 하셔서
하나님의 주권을, 그분이 나의 아버지 되심을 고백하게 하시는
그 현장이 분명히 존재했다면 내 영혼 속에 그 진리의 빛과 음성이 들렸던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만큼 그 임재의 은혜를 기억하며 살아왔고 살고 있습니까.
신앙의 연조나 공로만 남아있다면 우리는 참으로 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신명기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기억하라’고
그렇게도 당부하셨나 봅니다. 기억하지 않으면 우리는 현실과
금방 타협하기 쉽고 하나님과 멀어지기 쉬운 그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회심 후 바울은 두고두고 ‘이 현장’을 기억하고 삽니다.
핍박을 당할 때도 훗날 누군가 앞에서 복음을 증거할 때도 시간만 되면
기가 막힌 현실을 수많은 사람들, 특히 자신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조차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여러분이 나를 핍박하는 것은 예수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도 예전에 여러분과 똑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여러분처럼 광신자였고 복음에 극렬한 대적자였는데,
내게 은혜의 빛이 비춰서 이렇게 변화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그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비추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라고 간증합니다.
이 간증은 시간이 지나도 그 내용이 더해지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는 간증의 위험성은 회를 거듭할수록 간증의 내용이
부풀려져 본질보다 커진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만 남아야 하는데
그 보다는 자신의 공로와 열심이 더욱 크게 남아 자기 자랑만이
될 수 있습니다. 진정한 간증은 시간이 지나도
그 현장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자신을 박해하는 군중들 앞에서....
8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사도행전 22:3-8)
바울은 핍박을 당하는 지금 청중들 앞에서 과시할 것도 많은데
왜 과거 다메섹에서 경험했던 그 빛과 음성에 대한 고백을 할까요?
자신도 그 임재의 현장이 아니었다면 지금 자신을 향해서 돌을 던지는
청중, 당신들과 다를 바가 없는 아니, 오히려 더욱더 광포한 주동자였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자신의 과거와 오늘의 모습을 통해
‘은혜’아니면 불가능했다는 것을 솔직하게 토로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훗날 가이사랴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가이사랴의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2세 분봉왕 앞에서
재판을 받는 최후 진술에서
15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사도행전 26:9-15)
*바울의 가슴속에 큰 울림으로 기억되는 감동의 현장
바울의 마지막 최후변론에서 고백했던 것은 바로 ‘다메섹 사건’이었습니다.
빛 속에서 들려온 음성, 나사렛 예수 그분이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그분이 십자가에 죽은 나사렛 예수이시며 또 다시 사시고
승천하신 나사렛 예수라는 것을 가감없이 증거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또 기억하고 기억합니다. 그에게는 큰 울림의 현장이 많았습니다.
그만큼 많은 간증거리가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기회만 주어지면
바울은 자신이 핍박자였다는 것, 철저하게 대적자였다는 것과
그러한 그의 가슴에 빛이 비춰지고 음성이 들려져서 삶이
변화되었고 가망이 없는 존재였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그의 가슴에 가장 크게 울리는 울림이었습니다.
우리 가슴에는 과연 어떤 울림이 있습니까.
과거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졌다면 그 음성을 들었던 나의 어떤 자랑,
나의 우월함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와 사랑 때문에
내가 여기 있다는 것에 대한 깊은 성찰이 과연 얼마큼 우리에게 존재합니까.
기억하고 사는 것, 은혜 아니면 안 된다는 것,
이것이 신앙이며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그 은혜를 여전히 기억하고
살지 않으면 우리는 공로 주의자가 되고 맙니다.
은혜, 하나님의 그 사랑 아니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40년을 유랑 생활할 때 하나님은 매일매일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날마다 만나를 공급하시고
목이 마르면 반석에서 생수가 터져나오게 하셨고
더울 때는 구름 기둥이 덮어주었고 추울 때는 불기둥이 따스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기는커녕 끊임없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항변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참 기적 같은 모습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같은 삶을 살면서도 그 은혜를 모르고
대적했으니 말입니다. 이것은 단연 어리석고 극단적인 이스라엘만의 상황은
아닙니다. 오늘, 나도 그럴 수 있습니다. 은혜로 살아왔고
그 은혜로 살아왔으면서도 여전히 말로는 은혜인데, 공로와 자신의 가치에 따라 살 때가 많습니다.
신앙 경력으로 나름대로 인생의 다양한 나눌 이야기들은 많은데 안 들리고
못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안 들려서 예배가 끝난 후에
‘내가 뭘 들었지’ 한다면......
은혜로 사는 우리가 은혜를 여전히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이 ‘경력’뿐이라면 이것이 가장 위험한 것입니다,
*그 모든 이적보다 더 놀라운 것은 한 영혼 속에 나타나는 구원의 역사
가장 큰 이적은 우리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 구원의 역사입니다.
가장 큰 하나님의 역사는 나 같은 죄인을 구속하시고
내 안에 성령이 임하셔서 예수를 주로 믿는 이 놀라운 은총을
경험케 하시는 것입니다. 은혜 아니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고
내가 믿을 수 있는 존재도 아니라는 것, 은혜 아니면
이 자리까지 올 수도 없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어떤 이적보다도 한 영혼의 전 삶 속에 나타나는 하나의 구원역사,
하나님의 구원의 모든 계획, 이것이 기적입니다.
그것을 기억할 때마다 우리 가슴 속에는 감동이 존재합니다.
감동은 어떤 사건에 대하여 감사를 느끼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찬들은 마땅히 하나님의 구원 사건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전 인격적으로 매 순간 감사하는 존재여야만 합니다.
바울은 이것으로 삽니다. 우리와 다른 성령의 강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날마다 그 구원의 감동을 경험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수십 년 전, 핍박자였던 과거 그 현장을 여전히 기억하고
그런 자신에게 빛이 임해 굴복시켰고 들려온 그 음성으로 인생이
변화되었다는 것,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나도 저들과 똑같은
사람이었을 거라는 것을 마치 오늘 경험한 것 마냥
그에게는 여전히 생생한 감동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 감동이 삶을 살아가게 하는 하나의 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사람들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초자연적인 어떤 세계를
보게하고 남들이 모르는 신비한 것을 경험하게 하시기도 하지만
진정한 성령의 역동성은 나 같은 죄를 구속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동의 마음을 끊임없이 갖게 하시고
그 사랑에 대해 응답하도록 도우신다는 사실입니다.
* 바울의 인생 후반부의 고백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디모데전서 1:12-15)
인생 후반부의 고백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충성했기 때문에 맡기신 것이 아니다. 대적자요 핍박자였음에도
나를 충성되이 여기셔서 직분을 맡기셨다’
그의 고백에는 그 은혜에 대한 감동만이 존재할 뿐 그 어떤 자랑도
공로도 없습니다. 바울에게는 기적 같은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기억하고 또 기억하고 순교의 제물이 되기 직전까지 일평생을
기억하고 삽니다. 죄인 중의 괴수지만 은혜로 순복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앞에 감동하는 삶을 살도록 도우시는 놀라우신
은총에 대한 사무침만이 존재합니다.
*오늘도 들려오는 음성이 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바울을 비춘 그 빛이 우리 가슴에 임해야 하고
그 음성이 들려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저 종교인일 뿐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배가 회복되길 기도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있는 곳에서
빛이 비춰지고 음성이 들리지 않으면 ’예배가 회복되었으면 하는 바램‘도
하나의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린다 해도 하나님을 사모하며 우리 속에 임하는 빛이
느껴져야 하며 전 인격 속에 들려오는 음성이 있어야 합니다.
수십 년이 지나도 나 같은 죄인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호의와, 사랑,
그 은혜 아니면 나는 정말 죄인의 괴수였다는 것,
또 나로 하여금 이렇게 철저하게 인생의 방향을 바꾸게 하시고
은혜 앞에 살도록 인도하셨다는 것을
기억하고 감동하며 사는 것이 크리스찬의 진정한 삶의 모습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여전히 그 음성이 들려져야 하고 성령의 빛이 비춰져야합니다.
우리 안에 그러한 갈망과 삶을 하나하나 돌아볼 때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위대한 구원의 현장을 통해서
매 순간 감동할 수 있고 오늘의 현실이 아무리 각박하고
어렵더라도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 소망이
우리 안에 날마다 다시 한 번 채워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