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기자부
작성일
2022-08-07 09:53
조회
968
8월 7일 2ㅡ5부 현장예배
9시 2부예배
11시_3부예배
슬픔의 노래를 부르라 (룻1: 6ㅡ22)
시편을 읽어보면 감사의 찬양시보다
탄식하는 애가(哀歌)의 숫자가 더 많습니다. 1
시편의 가장 기본적인 태도는 찬양입니다.
그러나 애가가 찬양시보다 숫자적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시편의 저자들과 달리 오늘날 교회는 오직 ‘찬양'만을 강조하고
‘애가'를 무시하는 불균형이 발생하였습니다.
구약학자인 월터 브루그만은
“애가(哀歌)는 교회가 잃어버린 고귀한 영적 자산이다”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성경의 애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의 애가(哀歌)는 우리가 깊은 데 빠졌을 때 나오미처럼
하나님께 나아와 애가를 부르라고 가르치고 있다
문제가 없는 척 하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와 상실로 인한
고통을 부르짖고 하나님께 나아와 치유를 받으라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슬픔의 노래를 부르는 한 여인
나오미가 등장합니다.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다시 찾아오셔서
풍요롭게 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소망이 없는 나오미에게 희망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물론 그녀가 많은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남편과 자식들이 죽고 사라져버린 절망 속에서 나오미는 그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남은 여생을 그곳에서 살고 싶다.
그리고 고향 땅에 묻히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 전부였을 것입니다.
나오미는 극심한 슬픔 가운데 본문에서
처음으로 입을 열어 두 며느리에게 권면합니다.
7-9절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하나님께서 너희를 선대 하셔서 너희 둘 모두 재혼하여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너희가 시어머니인 나에게 며느리의 도리를 다했으니
이제 너희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두 며느리가 자신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돌아갈지라도
나오미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나오미의 권면은 시어머니로서 자신의 딸 같은 며느리들에게 자신이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자 배려였습니다.
나오미는 사랑하는 두 며느리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렇게 권면합니다.
(11-12절) “나오미가 가로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나오미는 두 차례나 반복해서 “내 딸들아”라고 며느리들을 부르면서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에 대해서 특히 모압 족속에 대해서 적대적인 유대인의 정서적인
분위기 속에서 어린 며느리들이 겪을 고통을 피하게 해주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나오미는 진심으로 두 며느리를 딸처럼 생각하며 배려하고 있습니다.
사실 나오미의 권면은 나오미에게 있어서 대단히 위험한 결심이었습니다.
고대 시대에 사람은 노동력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자녀를 낳을 수 없는 노년의 가난한 과부였을 뿐입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유일한 부양자이자 생계 수단이 될 노동력을 포기하고
“너희는 각각 친정으로 돌아가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로 두 며느리를 ‘사랑' 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근거가 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선대”라는 단어가 2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단어는 원어 상 서로 다른 의미입니다.
앞에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 같이”의
“선대하다”(아사)는 “행하다”는 뜻입니다.
즉 “너희가 죽은 너희 남편과 나를 정성껏 섬겼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의 “선대하다”는 “Hesed” 입니다.
“Hesed”라는 단어는 자비, 인애, 은혜, 긍휼등
하나님의 성품과 관련된 용어로 사용됩니다.
“Hesed”는 구약에서 매우 중요한 단어이기 때문에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Hesed”의 의미에 대한 용법을 연구한 학자들은
“Hesed”는 “약한 자가 곤궁에 처해 있을 때
강한 자가 그럴 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보이는 언약적 충성”이라고 정의합니다.
보통 충성은 하위자가 상위자에 대해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충성은 상위자가 하위자에게 보이는 자발적인
사랑과 헌신이 바로 “Hesed(인애)”입니다.
그리고 구약에 있는 이 표현과 가장 가까운 신약의 표현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아가페입니다.
그러므로 나오미는 지금 두 며느리를 향해 진정으로 여호와의 축복을 빌고 있습니다.
“너희는 둘 다 좋은 아내였고 좋은 며느리였다.
너희가 나에게 베푼 선한 일에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지만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자비와 인애를 채워주시기를 원한다”
9-10절 여호와께서 너희로 각각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
두 며느리는 나오미를 끌어안고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떠나지 않겠다”고 말하는 두 며느리에게 나오미는 재차 ‘떠날 것'을 권면했습니다.
결국 오르바는 친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14절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 시모에게 입 맞추되….
성경은 오르바에 대해서 비난하지 않습니다.
시어머니인 나오미가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길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을
선택한 것처럼 결국 오르바도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을 선택하였습니다.
오르바는 자신의 남편과 시어머니를 위하여 정성껏 섬겼고 선대 하였습니다.
우리는 불확실성이 큰 현실 세계 가운데 다양한 변수 앞에서
안정적인 미래를 선택하는 것은 매우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룻은 일반적인 상식을 초월한 선택을 합니다.
14절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그러자 나오미는 룻을 만류하고 설득하였습니다.
15절 나오미가 또 가로되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이를 정확히 번역하면
“네 동서는 그녀의 백성과 그녀의 신들에게 돌아갔다”는 뜻입니다.
오르바와 룻은 모압 족속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압 족속이 숭배하는 신은 ‘그모스’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압 족속인 너도 그모스를 숭배하는 너의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당시 고대 근동의 결혼 풍습을 고려할 때
룻의 나이는 10대 후반 이었거나 20대 초반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룻은 하나님의 백성들조차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영적으로 어두운 사사시대에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는 선택을 합니다.
16-17절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지금 룻은 “자신의 민족 그리고 자신이 믿는 신마저 버리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룻은 지금 생명이 아닌 죽음을 택하고 있습니다.
룻은 나오미를 선택하였습니다. 아니 룻은 하나님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는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라는 신앙을 소유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을 떠났습니다.
이와 반대로 룻은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 가운데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인생 소망이 없는 인생 심지어
생명이 아닌 죽음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룻은 “어머니가 죽는 그 땅에 함깨 죽어서 묻힐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1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룻이 나오미를 철저히 붙잡은 것은
그녀의 ‘신앙적 결단’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홀로 남은 나오미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아픔과 상실감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치셨다”고 고백합니다.
19-20절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우리는 보통 고통과 환난에 대해서 ‘하나님의 부재’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통과 환난을 당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부재로 인해 절망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고통과 환난 가운데서도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구원을 베푸시는 사랑의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이렇듯 탄식과 찬양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우리는 기쁠 때에만 여호와께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울 때에도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오미의 애가는 고통 가운데 “하나님 없이는 안 됩니다.
하나님만이 나를 구원하실 분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다음 세대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 가운데
그들의 미래와 비전을 이루어갈 때 “부모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다”는
믿음의 고백으로 목숨을 걸고 신앙을 끝까지 붙들고
살아가는 복된 세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결론입니다.
우리는 사실 나오미처럼 우리의 영혼은 ‘텅 비어있는 존재’였습니다.
텅 빈 우리의 인생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으로 우리를 끌어 안아 주시고
자신의 생명으로 우리의 영혼에 영원한 생명을 빚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치 룻이 나오미를 붙좇았던 것처럼 이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붙잡고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롬8:39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날마다 우리의 소망이 없는 인생 가운데 슬픔의 노래를 부르며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때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우리를 결코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안아주시는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11시_3부예배
슬픔의 노래를 부르라 (룻1: 6ㅡ22)
시편을 읽어보면 감사의 찬양시보다
탄식하는 애가(哀歌)의 숫자가 더 많습니다. 1
시편의 가장 기본적인 태도는 찬양입니다.
그러나 애가가 찬양시보다 숫자적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시편의 저자들과 달리 오늘날 교회는 오직 ‘찬양'만을 강조하고
‘애가'를 무시하는 불균형이 발생하였습니다.
구약학자인 월터 브루그만은
“애가(哀歌)는 교회가 잃어버린 고귀한 영적 자산이다”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성경의 애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의 애가(哀歌)는 우리가 깊은 데 빠졌을 때 나오미처럼
하나님께 나아와 애가를 부르라고 가르치고 있다
문제가 없는 척 하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와 상실로 인한
고통을 부르짖고 하나님께 나아와 치유를 받으라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슬픔의 노래를 부르는 한 여인
나오미가 등장합니다.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다시 찾아오셔서
풍요롭게 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소망이 없는 나오미에게 희망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물론 그녀가 많은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남편과 자식들이 죽고 사라져버린 절망 속에서 나오미는 그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남은 여생을 그곳에서 살고 싶다.
그리고 고향 땅에 묻히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 전부였을 것입니다.
나오미는 극심한 슬픔 가운데 본문에서
처음으로 입을 열어 두 며느리에게 권면합니다.
7-9절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하나님께서 너희를 선대 하셔서 너희 둘 모두 재혼하여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너희가 시어머니인 나에게 며느리의 도리를 다했으니
이제 너희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두 며느리가 자신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돌아갈지라도
나오미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나오미의 권면은 시어머니로서 자신의 딸 같은 며느리들에게 자신이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자 배려였습니다.
나오미는 사랑하는 두 며느리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렇게 권면합니다.
(11-12절) “나오미가 가로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나오미는 두 차례나 반복해서 “내 딸들아”라고 며느리들을 부르면서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에 대해서 특히 모압 족속에 대해서 적대적인 유대인의 정서적인
분위기 속에서 어린 며느리들이 겪을 고통을 피하게 해주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나오미는 진심으로 두 며느리를 딸처럼 생각하며 배려하고 있습니다.
사실 나오미의 권면은 나오미에게 있어서 대단히 위험한 결심이었습니다.
고대 시대에 사람은 노동력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자녀를 낳을 수 없는 노년의 가난한 과부였을 뿐입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유일한 부양자이자 생계 수단이 될 노동력을 포기하고
“너희는 각각 친정으로 돌아가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로 두 며느리를 ‘사랑' 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근거가 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선대”라는 단어가 2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단어는 원어 상 서로 다른 의미입니다.
앞에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 같이”의
“선대하다”(아사)는 “행하다”는 뜻입니다.
즉 “너희가 죽은 너희 남편과 나를 정성껏 섬겼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의 “선대하다”는 “Hesed” 입니다.
“Hesed”라는 단어는 자비, 인애, 은혜, 긍휼등
하나님의 성품과 관련된 용어로 사용됩니다.
“Hesed”는 구약에서 매우 중요한 단어이기 때문에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Hesed”의 의미에 대한 용법을 연구한 학자들은
“Hesed”는 “약한 자가 곤궁에 처해 있을 때
강한 자가 그럴 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보이는 언약적 충성”이라고 정의합니다.
보통 충성은 하위자가 상위자에 대해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충성은 상위자가 하위자에게 보이는 자발적인
사랑과 헌신이 바로 “Hesed(인애)”입니다.
그리고 구약에 있는 이 표현과 가장 가까운 신약의 표현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아가페입니다.
그러므로 나오미는 지금 두 며느리를 향해 진정으로 여호와의 축복을 빌고 있습니다.
“너희는 둘 다 좋은 아내였고 좋은 며느리였다.
너희가 나에게 베푼 선한 일에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지만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자비와 인애를 채워주시기를 원한다”
9-10절 여호와께서 너희로 각각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
두 며느리는 나오미를 끌어안고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떠나지 않겠다”고 말하는 두 며느리에게 나오미는 재차 ‘떠날 것'을 권면했습니다.
결국 오르바는 친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14절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 시모에게 입 맞추되….
성경은 오르바에 대해서 비난하지 않습니다.
시어머니인 나오미가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길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을
선택한 것처럼 결국 오르바도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을 선택하였습니다.
오르바는 자신의 남편과 시어머니를 위하여 정성껏 섬겼고 선대 하였습니다.
우리는 불확실성이 큰 현실 세계 가운데 다양한 변수 앞에서
안정적인 미래를 선택하는 것은 매우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룻은 일반적인 상식을 초월한 선택을 합니다.
14절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그러자 나오미는 룻을 만류하고 설득하였습니다.
15절 나오미가 또 가로되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이를 정확히 번역하면
“네 동서는 그녀의 백성과 그녀의 신들에게 돌아갔다”는 뜻입니다.
오르바와 룻은 모압 족속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압 족속이 숭배하는 신은 ‘그모스’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압 족속인 너도 그모스를 숭배하는 너의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당시 고대 근동의 결혼 풍습을 고려할 때
룻의 나이는 10대 후반 이었거나 20대 초반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룻은 하나님의 백성들조차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영적으로 어두운 사사시대에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는 선택을 합니다.
16-17절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지금 룻은 “자신의 민족 그리고 자신이 믿는 신마저 버리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룻은 지금 생명이 아닌 죽음을 택하고 있습니다.
룻은 나오미를 선택하였습니다. 아니 룻은 하나님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는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라는 신앙을 소유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을 떠났습니다.
이와 반대로 룻은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 가운데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인생 소망이 없는 인생 심지어
생명이 아닌 죽음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룻은 “어머니가 죽는 그 땅에 함깨 죽어서 묻힐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1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룻이 나오미를 철저히 붙잡은 것은
그녀의 ‘신앙적 결단’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홀로 남은 나오미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아픔과 상실감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치셨다”고 고백합니다.
19-20절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우리는 보통 고통과 환난에 대해서 ‘하나님의 부재’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통과 환난을 당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부재로 인해 절망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고통과 환난 가운데서도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구원을 베푸시는 사랑의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이렇듯 탄식과 찬양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우리는 기쁠 때에만 여호와께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울 때에도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오미의 애가는 고통 가운데 “하나님 없이는 안 됩니다.
하나님만이 나를 구원하실 분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다음 세대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 가운데
그들의 미래와 비전을 이루어갈 때 “부모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다”는
믿음의 고백으로 목숨을 걸고 신앙을 끝까지 붙들고
살아가는 복된 세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결론입니다.
우리는 사실 나오미처럼 우리의 영혼은 ‘텅 비어있는 존재’였습니다.
텅 빈 우리의 인생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으로 우리를 끌어 안아 주시고
자신의 생명으로 우리의 영혼에 영원한 생명을 빚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치 룻이 나오미를 붙좇았던 것처럼 이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붙잡고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롬8:39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날마다 우리의 소망이 없는 인생 가운데 슬픔의 노래를 부르며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때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우리를 결코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안아주시는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