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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부
작성일
2021-07-25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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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5일 주일 2부 ㅡ 5부 온라인예배
3부. 11시 온라인 예배 .....
1시 4부 온라인 예배......
듣는 자와 거부하는 자(II)' (예레미야38:14~23)
*언제나 죽음의 위기 앞에 있던 예레미야
예레미아서를 볼수록 가슴 아픈 현장이 계속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들,...
그럼에도 하나님의 가슴 속에는 언제나 포기할 수 없는
거룩한 사랑이 존재했습니다.
그들이 듣지 않아도 여전히 말씀을 전하라 명하시고
언젠가는 들을 것이라는 간절한 바람을 그들 앞에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겨 있는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가서 전달하라.’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을 따라 말씀을
전했지만 백성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지도자는 언제나 우유부단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예레미야는 항상 죽음의 위기 앞에 서 있습니다.
그를 대적하고 그의 모든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40년간의 사역 중 23년 동안 그는 끊임없는 죽음의 위협 속에
처해 있었음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득권 세력들은 언제나 예레미야에게 적대적이었고,
왕은 우유부단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듣지 않았습니다.
강하게 대적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듣는 척하면서
결국은 한 귀로 흘려버리는 우유부단한 왕을 통해 듣는 것이
얼마나 복인가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5 시드기야왕이 가로되 보라 그가 너희 손에 있느니라
왕은 조금도 너희를 거스릴 수 없느니라(예레미야 38:4-5)
시드기야는 자신의 왕권이 약하다는 것을 토로하고 방백들이 좌지우지합니다.
국가가 위기에 빠졌는데 왕은 손 놓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지도 않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방백 들에게 맡겨놓고 그 방백들은 국가야 어떻게 되든 말든
기득권만을 얻기 위한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로 이끌어가는 모습이
본문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예레미야는 죽음의 위기 앞에 서게 됩니다. (예레미야 38:6)
*예레미야를 존중히 여겼던! 에디오피아인!
대적자들은 그를 우물 속에 집어넣고
그의 입술이 닫히기를 원했습니다.
그가 죽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습니다.
9 내 주 왕이여 저 사람들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행한 모든 일은
악하니이다 성 중에 떡이 떨어졌거늘 그들이 그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으니 그가 거기서 주려 죽으리이다(예레미야 38:7-9)
*일시적으로나마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갖는 듯하지만!
시드기아를 권고하여 예레이야를 살리고 한 사람은
에티오피아 출신으로 노예로 끌려온 ‘이방인, 환관’이었습니다.
그는 예레미야를 위해 탄원하고 있습니다.
‘저들이 예레미야를 우물 속에 집어넣어 결국 굶주려 죽게 될 것입니다.’
라고 직고를 합니다.
그는 이방인이며 환관이지만 예레미야에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증거하는 모든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그는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환관 조차도 국가가 큰 위기에 빠져 있다고
판단할 만큼 심상치 않은 상황이었지만
한 국가의 왕은 우유부단하여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을 도외시 한 채 오로지 도피하는 모습으로
주저앉아 있는 것입니다. 시드기아는 환관의 말에 예레미야를
풀어주고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갖는 듯하지만
그것은 잠깐의 일시적인 관심으로 그칩니다.
14 시드기야왕이 보내어 선지자 예레미야를 여호와의 집
제 삼문으로 데려오게 하고 왕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한 일을
물으리니 일호도 내게 숨기지 말라 (중략......... )
18 네가 만일 나가서 바벨론 왕의 방백들에게 항복하지 아니하면 이 성이
갈대아인의 손에 붙이우리니 그들이 이 성을 불사를 것이며
너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예레미야 38:14-18)
*그러나 결국은 듣지 않는 자로 결말
왕은 결국 듣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예레미야는 알고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이 위기에서 국가가 살 수 있는데,
그는 듣지 않습니다, 시드기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허망한 말뿐입니다.
예레미야는 시드기아에게 하나님의 가슴을 그대로 전달합니다.
‘당신은 바벨론에게 순복하십시오.
그들에게 항복하고 철저하게 자신을 위탁하십시오.
이집트를 의지하고 그들의 우상을 끌어들이지 말고
그들이 도와줄 거라 착각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무릎 꿇고
하나님의 주권 앞에 철저하게 순복하십시오!
하나님은 지금 바벨론을 통해서 이 유다를 징벌하고 계십니다.
바벨론에게 순복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 앞에 돌아오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이집트와 그들의 신을 의지하며 도울 것이라는
헛된 기대를 하고 있습니까.’
그들의 어리석은 모습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철저한 불신앙
이었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왕에게 직고 합니다, ‘왕이여, 당신이 항복하면
이 성은 다시 보호를 받을 것이고 결코 불타거나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항복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대적하면 이 성은 결국 폐할 것이고
모든 사람은 다 포로로 끌려가는 비극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시드기아가 예레미야의 경고를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이집트라는 헛된 것을 의지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범죄를 인정하고 돌이키는 철저한 회개가 있었다면
유다 왕국이 그렇게 처참하게 몰락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시드기아는 결국 ’듣지 않은 자‘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예레미야를 제거하려는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그를 보호해 주기는 하지만
결국 시드기아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권고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자신의 삶을 돌이키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듣지 않은 자‘로 평가를 받았을 뿐 아니라
그 인생의 결말 또한 불순종의 삶으로 끝이 납니다,
"부분적인 순종은 불순종이다." ㅡ앤드류 머레이
우리는 한 번 순종하면 ’순종‘했다고 착각하지만 부분적인 불순종은
모두 불순종입니다.
시드기아는 예레미아의 경고에도 결국 듣지않고,
돌이키지 않고 흘려버리고 맙니다. 그 후 성은 완전히 봉쇄되고
1년 6개월 가까이 기다려온 백성은 굶어 죽어가고 또 많은 백성들이
홀로 도망치기 위해서 성을 빠져나갔다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되는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게 됩니다.
입에 담지 못할 만큼 처참한 시드기아의 운명이 본문에 등장합니다.
그가 체포되고 자신이 앞에서 모든 왕자들이 죽임을 당합니다.
그는 그 면을 고스란히 목격합니다. 그리고 두 눈이 뽑힌 채 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가 죽을 때까지 감옥에 있다가 나오게 되지만
그는 실성해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경고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로 유다는 역사의 문을 닫게 됐으며
다윗의 왕조는 회복되지 못하는 국가의 패망을 경험하게 됩니다.
국가는 사라지고 그 화려했던 왕조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1 유다 왕 시드기야의 구년 시월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과
그 모든 군대가 와서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치더니
7 왕이 또 시드기야의 눈을 빼게 하고 바벨론으로 옮기려 하여
사슬로 결박하였더라(예레미야 39:1,6-7)
*고통과 위기가 전혀 선용 되지 못함
만약 그가 그 처한 현실 앞에서 말씀 앞에 무릎 꿇고 돌이켰다면
오늘 본문 속에서 예레미야가 전달하는 경고를 듣고 깨달았다면,
성문을 활짝 열고 ’내가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항복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우상앞에 무릎 꿇고 이집트를 의지했습니다.
이 모든 게 하나님 앞에 범죄였습니다‘라고
그가 선언했더라면 그의 왕조는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며
이렇게 비참한 운명으로 몰락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말은 그럴 듯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이방 나라
바벨론에게 무릎을 꿇는단 말이냐‘ 라고 했지만
실상은 이집트를 의지하고 그들의 우상까지도 숭배했습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성민이라는 자존감을 드러내지만 실제로는
온통 우상과 이집트를 향한 갈망이 가득한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 통해서 유다를 징벌하셨고 그들이 깨닫고 돌이키면
언젠가 하나님의 회복의 언약의 시대가 반드시 올 것이었지만
그들은 듣지 않고 끊임없이 그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토스트 예프스키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게 되는 것이다. -ㅡ도스토옙스키
고통은 가치를 형성합니다, 기왕에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라면
그것을 통해 내 인생에 유익이 되어야 합니다,
내 삶 속에 뭔가 새롭게 인생의 방향을 점검할 수 있는 기회로 선용이되야
합니다, 그 고통이 아무런 의미가 되지 않는다면 그 삶은 피폐해집니다.
시드기야는 자기 아버지 요시아의 삶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을 겁니다.
요시아는 서른여덟에 왕위에 올라 39세에 그가 므깃도 전투에서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그 왕조가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하죠.
여호아하스가 23세에 왕위에 오르고 석달 만에 이집트 파라오 느고에
의해 폐위되어 이집트로 끌려갑니다.
여호야김은 25살에 왕에 오른 후
11년 동안 통치합니다.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고
36세에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갑니다.
그 후 여호야긴 이 18세에 왕위에 오르고 불과 100일을 통치한 후
바벨론에 끌려갑니다. 시드기아는 요시아의 아들이자 여호야긴의
삼촌으로 21세에 왕위에 올라 11년 통치하지만 결국 멸망하고 맙니다.
2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다스린지 십 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3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여호야김 시대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시드기야의
제 십 일년 말까지 임하니라 이 해 오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히니라(예레미야 1:2-3)
*집중적으로 돌아오라 외쳤던 기간 ㅡ약 23년
놀라운 것은 요시야가 그렇게 몰락하던 때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왕조의 멸망까지 그 기간 동안 사역했던 예언자가 바로
예레미야였습니다. 그의 사역 기간이 40년이었고,
그 중 23년 동안을 죽음의 위기를 넘나들면서 그는 끊임없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경고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가슴을 그들에게 전달 했습니다.
’내게 돌아오라 그리해야 너희가 살 것이다.‘
*나 자신을 말씀의 거울 앞에 비춰보며
철저하게 돌이켜야 하는 오늘!
여러분, 예레미야서 전체를 읽어보면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분노로만 가득 차 있는 것 같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내게 돌아오면 내가 너를 회복해 주겠다.
돌아오면 내가 너희와 함께하겠다‘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의 고백이
드러나는데 그들은 한 번도 듣지를 않습니다.
결코 ’짧은 기회‘가 아니었습니다. 길게는 40년이고,
아무리 압축해도 23년 동안 예레미야의 모든 사역을 통해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그 긴 시간 동안
한 번도 듣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단기간에
한꺼번에 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서 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이 돌이키길 기다리며 기회를 주시고 계셨습니다.
돌이킬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듣지 않았고 돌이키지 않았기 때문에 패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레미아서에 드러나는
유대민족의 답답한 상황을 보면서 가슴이 아픕니다. ’
왜 이렇게까지 어리석고, 무지하고 고집스러울까‘ 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바로 ’나의 모습‘이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누군가를 정죄하기보다, 어떤 상황에 대해 비판하기에 앞서서
그 모든 내용이 또한 ’나를 향한 하나님의 경고‘라는 것을 기억하며
말씀의 거울에 나자신을 비춰보아야 합니다. ’나는 과연 어떠한가‘
*지금은 말씀 앞에 무릎 꿆을 때!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 할 때!
’지금 내 삶의 모습은 어떠한가! 나는 무엇을 의지하고 있으며
무엇으로 내 삶의 동력을 삼고 있는가!’를 철저하게 성찰하고
다시금 방향을 점검하여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만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임을 오늘 예레미야서는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말씀 앞에 무릎 꿇을때입니다
누구 탓, 비난하고 정죄하기 전에 우리는 솔직하게 말씀앞에
무릎 꿇고 우리만이라도 기도하며 이 땅을 회복하시기를
민족을 회복하시기를, 전 세계가 철저하게 우상을 버리고
주께 돌아오며 오만함과 방종을 철저하게 버려서
하나님의 한 대신 앞에 무릎꿇기를 갈망하고 선포하는
그런 신앙의 개혁이 우리한테 필요한 것입니다.
바로 ‘내가’ 이 말씀앞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나부터 말씀 앞에 무릎 꿇어야 합니다
*존 던 (1572~1631)
ㅡ'비상시의 기도문!'(1623년 페스트에 걸려 약 한 달간 사경을
헤매며 기록한 23편의 묵상집)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의 시인이자 하나님의 사람으로
어려웠던 한 시대를 살아낸 ‘존 던’의 시를 소개 합니다.
1903년에 페스트에 걸려 한 달 넘게 죽음의 사경을 헤매는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토로하며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다루고 있는 기도문입니다.
런던에서는 세 가지 이유로 예배당 종을 울린다고 합니다.
첫째는 예배 시간을 알리는 종이고
두 번째는 누군가 죽었을 때 종을 울립니다.
세 번째는 누군가 지금 위급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의 기도문 중 ‘망종의 종소리’라는 제목의 기도문이 있습니다.
이 종소리는 누군가 지금 위험하다라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울립니다,
망종의 종소리 –존 던
태양이 떠오를 때 누가 바라보지 않으며,
유성이 하늘을 가로 지를 때 누가 올려다보지 않겠는가?
종소리가 날 때 무슨 일인가 하여 귀 기울이지 않는 이가 있는가?
내가 듣는 이 종소리는 내 자신의 일부가 이 세상에서 사라짐을 의미한다.
인간은 아무도 고립되고 독자적인 섬이 아니다.
흙덩이 하나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면 유럽이 그만큼 작아진다.
곶이 쓸려 나가든 친구나 내 소유의 영지가 쓸려 나가든 마찬가지다.
나는 인류의 일부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의 죽음에도 나는 그만큼 줄어든다.
그러니 누구를 위해 종이 울리는지 알려고 하지 말라.
종은 그대를 위해, 나를 위해 울리는 것이다.
이런 음울한 생각으로 내가 이웃의 불행을 흡수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나만의 불행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사실 고통은 일종의 보물이다.
고통으로 우리가 성숙하고 원숙해져서
하나님께 합당한 자가 될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내 보물을 화폐가 아니라 금덩이로
가지고 다닌다면 여행하면서 경비를 지불하는 데 도움이 안 될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고난은 일종의 보물이지만
우리가 천국의 집에 점점 더 가까워지기 전까지는 그리 유용하지 않다.
이웃 사람이 죽을병에 걸려 누워 있어도
그의 고통이 광산의 금처럼 그의 내부에 머물러 있어서
별다른 쓸모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병을 알리는 종소리는 그 황금을 캐내어 내게 준다.
나는 그의 곤경을 생각함으로써 내 곤경을 숙고하고,
우리의 유일한 보장이 되시는 하나님께
의지하고 도움을 구함으로써 내 안전을 확보한다.
누가 비급하다 누가. 죽었다를 알리는 종소리.
그 소리를 들으면 우리는 알려고 할겁니다.
‘누가 위급하지? 누가 죽었지? 하지만 그 종소리는 결국
우리 모두 위급해지고 죽는다는 것을 경고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누군가 병들었다 한다면, 그 사람의 고통은 그저 우리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사람의 고통스런 삶을 통해
나 자신을 성찰하면 그것은 나에게 유익이 돨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모든 고통을 그저 나와는 상관없는 누군가의
고통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고통이 될 것이고
내가 그것을 성찰할 때 우리는 더욱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의 삶으로 건고히 설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해주는 것입니다.
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우리 모두는 ’섬‘이 아닙니다.
대륙입니다.
섬은 혼자 독립적이지만 대륙은 한쪽이 무너지면 다른 한쪽이 사라집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더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럴수록 이 민족과
또 공동체 모든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끌어안고
하나님께 더욱더 기도하고 의지하며
살아내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