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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부
작성일
2021-01-17 10:05
조회
2218
1월17일 2부 ㅡ5부 온라인예배' ㅡ복음의 영향력!'(사도행전 4:8-21)
1시 4부예배 ....
'복음의 영향력!'(사도행전 4:8-21)
미국의 Grace Community Church의 존 맥아더 목사는
그의 저서 Sleiv, 즉 노예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초대 교회의 신앙인들에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따르는 자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 이름은 애초에 불신자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비웃는 표현이었다.
그러나 비웃음으로 시작된 그 칭호는 곧 존경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동일한 자들,
예수님의 충성스러운 추종자로 간주되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는 용어를
자신에게 적용해야 했다.
'그리스도의 노예' 란
전적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매사에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겠다는
자발성과 열망으로 오직 주님이 만족하시는 것에 동기 부여되는 삶을 의미한다.
이것이 Sleiv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크리스찬은 모두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어야 하며
자발적이고 전적인 복종으로 선언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의 요소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람, 크리스찬은 전적인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합니다.
내 생명도 내 삶의 모든 소유도 하나님 것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또한 무조건적인 복종이 있었습니다. 크리스찬은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도
하나님 앞에 복종했으며 오직 헌신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의 전 삶으로 복음을 증거하며 일평생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데 기꺼이 희생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존했습니다. 자신의 힘과 세상의 배경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헤와 그분의 능력을 의지하며 주어진 소명을 감당하며 끝까지 책임 완수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도바울 조차도 그의 사명선언문에서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를 위해 나의 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않겠다’라는
고백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거룩한 선언을 드러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그리스도인' 된 우리는 구원 얻었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그의 자녀, 상속자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그의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그분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에 동의해야만 합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그 은혜와 사랑에 감동하여 자발적으로 동의하는 진정한 크리스천의 삶의 모습입니다.
사도바울도 그의 모든 서신서에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 으로 소개합니다.
한때 그는 자신의 의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다고 확신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에수를 만난 후 그 은혜에 사로잡혀 스스로 ‘그리스도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것’으로서 기꺼이
복음증거의 합당한 삶을 살겠다는 것이 바울의 모습이었습니다.
당시 크리스찬의 삶의 모습도 그랬습니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또 어떤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브리서 11:36-38)
‘세상이 감당 할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은 기꺼이 복음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복음만 포기하면 핍박을 사라지게 할 수 있었고 과거의 부유함을 누릴 수 있었지만
그들은 모든 것을 거부하고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핍박하며 압박하는 세상을 향해 그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합니다.
3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사도행전 5:27-32)
베드로와 요한은 산헤드린 공회 안에서 당당하게 선언합니다.
더 이상 과거의 그들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압박에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임하신 후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사도들로서
세상에 복음을 당당하게 증거하는 하나님의 메신저들 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역동성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부활 그리고 승천하신 이후 교회가 갖는 강력한 증거였습니다.
초대공동체의 탄생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 뿐 아니라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이었다는 것에 대한 중요한 반증이었습니다.
한때 두려움으로 숨었던 그들이 이토록 당당하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의 확실성과
그들의 전 인격속에 내재하신 성령님의 역사였습니다,
그 어떤 두려움보다 자신들이 직접 보고 경험한 사실들을 대언하고
증거하는 ‘증인의 삶’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역사앞에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사도행전 4:12)
예수 이름만이 진정한 구원의 능력임을 핍박과 압박 앞에 재천명하는 것입니다.
초대공동체는 그 시작과 함께 종교 지도자들의 철저한 반대와 훼방,
핍박에 끊임없이 공격을 받았지만 무너지지 않고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결코 포기할 줄 몰랐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있게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삽니다. 이것이 초대공동체의 영향력이었습니다.
영향력은 큰소리나 힘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가슴속에 진리에 대한 확신과 하나님 은혜에 대한 사무침이 약해 보이지만
그들의 삶을 통해서 강력하게 퍼져나가는 생명력을 파급시키는 것입니다,
영향력의 가장 궁극적인 목표와 바람직한 결과는 어떤 명령이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복음에 대한 확신과 그 은혜에 대한 사무침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감출 수 가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크리스찬의 진정한 생명력입니다.
따라서 에수 십자가, 죽음, 부활하심을 믿는 그 한 사람으로 인해 그 영향력은 서서히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진리가 성령을 만나면, 참된 지식이 열정을 만나면 영향력은 드러납니다.
반면에 비진리, 무지함이 열정을 만나면 과격함과 선동만이 드러날 뿐입니다.
교회의 진정한 영향력은 코로나로 인한 열악한 상황에서 비로소 드러나야 합니다.
이 시대 가장 큰 재앙은 ‘천박함’입니다.
세상을 향해 과격하게, 힘으로 선동하고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힘이 약해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사모하는 그 생명의 영향력으로 인해 스스로 자제하고 낮추는 것임을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큰 믿음의 삶을 사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바로 신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지만 신실함을 보여집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늘 하나님 앞에 점검해야합니다. 은헤로 구원을 받았지만
그 구원은 세상에 나가서 진정한 크리스찬으로서 살아내도록 하기위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큰 믿음의 삶은 결국 신실한 삶으로 드러납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부터 나타나는 사건을 우리는 잘압니다,
베드로는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는 태생부터 장애인 된 자를 만나고
그를 불쌍히 여깁니다. 그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는 것을 베드로는 확신합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사도행전 3:6)
복음을 들음으로 이 장애인은 믿음을 갖게 되고 그 믿음은 일어나
걷게 하는 놀라운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이 베드로 자신을
주목하는 소리를 듣자 베드로는 그 반응을 단호히 거부하고
오직 그 능력은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죽음심 부활에서 나왔음을 증거하기 시작합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사도행전 3:12)
장애인을 걷게 한 것은 사도들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에서 나온 능력이었습니다.
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사도행전 3:13-16)
베드로는 이스라엘이 거부했던 예수, 십자가로 내몰은 그 예수의 이름이
장애인을 걷게 한 능력이며 그 예수가 장애인뿐 아니라
우리의 구원자 되심을 담대하게 증거합니다, 이것이 생명의 능력입니다.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사도행전 4:4)
개인 간증도 어떤 세상의 교훈도, 흥미를 끌만한 이야기도 없었습니다.
오직 복음만이 있었습니다. 그 복음이 오천 명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역사를 이루어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었습니다.
복음만이 세상을 살릴 유일한 능력입니다.
공산주의 치하에서 신앙을 억압당한 동유럽국가들이 그 체제가 무너지고
자유를 얻게 된 후 가장 먼저 행한 것은 ‘신앙의 회복’이었습니다
. 50년 동안 단절된 신앙생활이었지만 그들의 신앙에 대한 갈망과 기도로 바로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마음껏 예배하지 못하고 비록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도
곧 복음을 통해 회복되고 더 큰 기쁨을 누릴 것이라는 갈망과 사모함! 우리가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압박은 여전히 계속됩니다.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사도행전 4:18-20)
사도들은 세상의 압박과 핍박에도 여전히 증인의 삶을 살겠다고 선언 합니다.
공동체의 태도는 기도하며 모든 난관을 꿋꿋이 헤쳐나갑니다.
31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사도행전 4:29-31)
사도들은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고 공동체는 기도합니다.
기도는 무엇을 얻고자 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것, 하나님의 뜻과 바램에 나의 마음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공동체는 기도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그들의 기도는 핍박을 사라지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떠한 고통과 위기 속에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하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할 때 성령의 역사하심이 가득했습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한1서 5:4)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선언하며
매 순간 내게 베푸신 은혜에 감격하고 증인의 삶을 감당하며,
내가 있는 곳에서 거룩한 영향력을 드러낼 때 세상은 그 ‘온기’를
통해서 결국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 입니다.
아무리 많은 눈이 쌓여도 봄의 따스함이 임하면 모두 녹여버리는 것처럼
세상이 아무리 강팍하고 타락하며 어려움이 가득해도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 속에 분명히 눈 녹듯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신뢰합니다.
다만 터널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 마음을 헤아리고 현재 주어진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복음을 증거하고 여전히 복음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능력임을 선포하며
우리가 있는 ‘지금, 이곳에서’ 하나님 은혜에 대한 사무침으로 살아갈 때 우리를 통해
나타나는 복음의 위대한 생명력, 영향력이 나타나는 현장이 가득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