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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부
작성일
2021-12-19 09:50
조회
916
12월 19일 2부-5부 예배
9시...... 2부 현장 예배
3부 11시 현장예배.....
7시 1부 그레이스 엔젤스 현장예배......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엡6:19—24)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6:20)
*당당한 죄수(?)--로마로 압송 당하기 바로 직전에
가이사랴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던 현장
사도 바울은 로마에 1차 구금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는 복음 때문에 로마까지 끌려왔고,
지금 기약 없는 구금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가슴 속에는 복음을 향한 거룩한 열정과 공동체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 가득했다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26장을 보게 되면 바울이 2년 동안 가이샤에
구금되어 있다가 로마로 압송 당하는 과정들이 나타나는데
그중 하나의 사건이 재판을 받는 장면입니다.
가이사의 법정에서 그는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2세 왕 앞에서 재판을 받지만
그는 자신만만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것은 사람을 향한 용기가 아니라 복음에 대한 자신감 복음에 대한 확신이었고
그것은 그가 변증하는 시간 시간마다 가득 드러나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쇠사슬에 매인 죄수의 몸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현실
베스도는 모든 과업들을 척결해야 되는 상황에서
가장 큰 문제가 바울을 재판하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을 정죄하는 수많은 유대인들의 상소가 올라와 있었지만
바울을 정죄할 만한 근거는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기 때문에
결국 전임 총독 벨릭스도 시간만 끌다 내 버려두고 떠나버렸던 것입니다.
새로 부임한 베스도는 유대인들의 요구를 들어줌으로써
그들과의 관계를 순탄하게 이어 갈것이냐 아니면 갈등을 빚느냐를
고민한 결과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이 재판에 아그립바 2세라는 젊은 왕을 초청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이 정죄 받고 그에 따른 형량 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재판에 참석한 유대인들의 열망 속에서 바울은 최후 변론에서 복음만을 증가합니다.
* 자신에게 주어진 최후 변론 시간-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되심을 증거
마지막으로 주어진 최후 변론에서 왜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담담하게 증언합니다.
바울 자신 또한 과거에는 핍박자였고
수많은 크리스찬들을 철저하게 배척했으며 옥에 넘기고
죽이기도 했음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과거였습니다.
자신을 고발하는 유대인들처럼 자신도 열심을 다해 복음을 대적했던 그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영혼의 눈을 떴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예수께서
나의 구원자임을 확신하게 되었고 이제 이 복음을 위하여
지금까지 헌신하는 삶을 살아왔음을 증거 합니다.
*분봉왕 아그립바 2세--“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는도다”(행26:27)
바울은 아그립바 2세 왕에게 담대히 묻습니다.
‘아그립바 왕이시여! .
당신은 이 십자가 사건을 알지 않습니까?’
아그립바 2세 왕은 바울의 질문에 난처했습니다.
대답을 해야 했지만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는 유대의 분봉왕이기 때문에 모든 역사적인
사실을 다 알고 있었고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반박하기 상당히 껄끄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베스도가 외칩니다,.
*죄수가 되어 베스도 총독에게 답변하는 바울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했구나“(행26:24)
바울은 답변합니다. ‘베스도 총독 각하,
내가 미친 것이 아니라 진실로 바르고 정신 차린 말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현실적으로 일어났던 사건을 당신에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미쳐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저는 지금 진정한 하나님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 아니라 오늘 이 자리에서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행26:29)
*바울의 로마 행(행27-28장)
이것이 바울의 복음 증거였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을 ’예수‘라는 나쁜 질병을 퍼뜨리는 ’염병‘으로 매도합니다.
그를 공격했고 어떻게든 그를 정죄하고자 하지만 바울은 자신을 변호하는데
급급한 것이 아니라 예수 십자가 죽으심,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임을 담담하게 증언합니다. 그리고는 황제 앞에서의 재판을 청구합니다.
바울은 결국 로마까지 압송을 당하게 되고 우리가 잘 알듯이 광풍을
만나 죽을 뻔한 위기를 겪게 됩니다. 로마에 도착한 후에는 기약 없는
구금 생활이 이어집니다.
*무심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여러분 한번 연상해 보세요. 하나님만 의지하며
이런 고난과 파란만장한 다양한 기적과 역사를 경험하면서
로마까지 왔다면 그 이후에 어떤 스펙타클한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까 기대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역사는커녕, 바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기약 없이
갇힌 채로 2년 동안 옥에 갇혀서 들어오는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엡6:19)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가 이해 못 할 부분이 많습니다.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3주 동안 삶의 희망이 끊어졌을 때,
바울의 기도를 통해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함께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신다
약속했으니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리라고 안심시키고 격려합니다.
얼마 후 몰타라는 섬에 도착해 구원을 얻은 후 독사에
물려 원주민들로부터 흉악한 죄인으로 몰리지만 독이 퍼지지 않는
바울을 다시 신으로 섬기려 할 때 그들을 멈추게 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섬겨야 할 대상임을 전하며 복음전합니다.
그때 보블리오라 하는 추장의 아버지가 병들자 그를 고쳐줌으로써
그곳의 많은 원주민들이 예수를 믿고 크리스찬으로
가득한 섬으로 바뀌게 되는 역사를 경험합니다 .
이런 역사가 있었으면 로마에 가서도 뭔가
큰 역사가 나타날 것이라
어쩌면 바울도 은근히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동역 자들에게 부탁하는 중보기도
결국 로마까지 가서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상황속 에서도
바울이 가는 곳곳에는 자신을 맞이해주고 격려하고 축복하는
많은 동역자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동역자들을 통해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마음의 담력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비록 현실은 2년 동안 갇힌 채로 세월만 야속하게 흘러가고 있었지만
그곳에서도 바울은 유대 지도자들을 초청해서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일지
거부할지에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복음을 증거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냈습니다.
2년 동안 갇혀 있다가 잠깐 풀려나서 6개월 동안 자유의 몸이 되지만
또다시 체포되어 바울은 결국 네로 황제 때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버립니다.
옥중서신 중 하나인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울이 죽음을 맞이하기
불과 1년전 이었습니다. 기약 없는 현실은 계속되고 있었고
황제가 나를 불러 재판을 무효화시키고 자유를 주지 않을까? 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상황은 점점 악화 되어 갔습니다.
게다가 복음으로 세웠던 공동체에 대해 들려오는 소식은
상당히 부정적이었고 비관적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전심으로 기도하며 성령의 감동으로 서신서를 보냅니다.
우리가 새벽마다 함께 나누었던 골로새서가 바로 그 내용입니다.
바울이 에베소교회를 3년 동안 섬기며 떠날 때 부탁한 내용은
자신이 떠난 다음 흉악한 이리가 들어와 주께서 피로서 값 주고
사신 이 교회를 삼키지 않을까 걱정하며 그는 이렇게 당부합니다.
’ 여러분! 3년 동안 여러분에게 전한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범사의 본을 보이고 진정 하나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달했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지만 이 공동체는 얼마 가지 못해 이단의 공격,
즉 니골라당의 교훈을 받고 와해되어갑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실 것은 어차피 우리 영혼뿐이니 가뜩이나
힘든 삶 속에서 육체는 적당히 방종해도 괜찮다 라는
달콤한 소리가 에베소 교인들의 영혼을 서서히 유린 하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몸은 사슬에 매어 있을지라도 복음만은 매이지 않도록.....
우리가 너무나 잘 알듯이 바울은
1장에서 우리가 어떤 신분인지를 드러냅니다.
그 목적이 우리로 하여금 그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바울은 선언합니다.
부부 생활도 바로 예배이고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도 예배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만나는 직장 상사와 부하직원과의
모든 관계도 다 예배의 현장임을 바울은 우리 앞에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현장이 예배입니다.
지금 바울은 이 복음 때문에 갇혀있고
또 갇혀있음에도 끊임없이 복음을 위해
스스로 최선을 다하고 공동체에게도 다시 복음으로 연합될 것을
간곡히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가고 바울 곁에 있던 사람들은 떠나갑니다.
로마서 12장을 보면 최소 36명 이상의 수많은 동역자가 함께
바울을 격려했고 또한 바울 곁에서 그와 사역했음을 볼 수 있지만
이제 하나 둘 그의 곁을 떠나가고 점점 회의감이 감도는 상황이
되어버린 현실입니다.
이렇게 점점 깊어지는 고난의 현실 속에서 떠나가는 동역자들을 보면서
참으로 먹먹했을 바울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이러한 상황속 에서도 바울은 자신의 고달픈 삶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고
오직 복음만이 제한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당부합니다.
사사로운 욕구도 자신의 이익을 위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복음을 향한 간절한 부탁이었습니다.
이 부탁 속에 기도만 담겨 있을까요.
여러분이 그 복음을 위해서 다시 한번 열심히 뛰어달라는
간절한 바람도 담겨 있을 것입니다.
그가 비록 갇혀 있지만 그럼에도 복음은 확산 될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는 이 말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상황이 힘들수록 우리는 인생에 관점을 바로 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눈을 들어 주를 보라’ 주를 바라보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관점이 되어야 합니다.
내 앞의 현실과 사람을 보면 절망할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현실과 사람을 바라봤다면 기약 없는 상황으로
절망하고 하나, 둘 떠나가는 그 사람들을 원망했을 것입니다.
어쩌먼 그것이 인간의 한계일지 모릅니다.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면서
우리는 다양한 한계를 만나게 됩니다.
그 한계는 나 자신일 수도 있고
타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한계에 다다를 때 절망하기보다는
나의 시선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 아니면 안 되는
우리의 삶에 대한 분명한 선언이 필요하다는 것을
재 인식 해야만 합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딤후 4:17)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자기 힘을 앞세워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보고자
일어났을 때 그의 나이 40세였습니다. 그는 파라오의 공주의 아들이며
모든 애굽의 학문을 다 배웠기에 통치할 만한 자격이 있다고
스스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루 아침에 그는 살인자, 실패자가 되어
광야를 떠돌아다니는 인생으로 전락합니다.
무려 사십 년 동안 그의 운명은 가혹한 현실에 내몰리게 되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한 채 그는 은근히 원망했습니다.
모든 것을 가졌다고 자신했던 40세에도 실패했는데
80세 노인이 된 지금 그 위대한 과업을 이루기에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고백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놀랍게도 그때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는 그를 통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닐 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께 시선을 두고 하나님을
더욱더 바라보고 의지하고 신뢰하며 인생의 방향을 잡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7절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 자신의 능력, 힘을 과시하는 게 아니라 그를 도우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모든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명에 집중하라!
‘하나님 나는 그저 그릇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시면 내가 사용되겠지만
사용하지 않으면 나는 용도 폐기될 수밖에 없는 질그릇에 불과합니다!
질그릇 자체가 무슨 능력이 있으며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고린도후서 4장을 보면
’우리가 이 질그릇에 보배를 담았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담고 항상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을 살면
가치 있는 존재가 되지만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시선을 집중하지 않고
세상의 가치관으로 철저하게 전락해 버리면 우리는 그저 쓸모없는
질그릇에 불과한 것입니다. 깨져서 쓸모없는 질그릇 일수록,
상황이 어렵고 힘들수록 하나님 앞에 더 집중해야 되고
내게 베푸신 사명이 뭔가에 대해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명이 있는 한 죽지 않습니다!‘
위험한 건, 사명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사명이 있는 한 우리는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바울은 사명이 있었습니다. 도대체 그 위대한 바울의 삶은 왜 저럴까.
복음 때문에 로마까지 왔는데 복음을 확장시키기는 커녕
사슬에 매이고 갇혀 있는 그의 초라한 모습, 사슬의 매인 모습을 보며
바울 곁을 지켰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가는 상황에서도
바울은 그들에게 사슬에 매인 자신 때문에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오히려 복음 때문에 자랑하고
복음 때문에 더 거룩한 열정을 드러낼 것을 간곡히 부탁합니다.
목적이 중요하고 본질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 얼마나 더 많이 알고 있는나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존재케 한다는 것,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그 은혜가 존재케 한다는 것, 그것만이 결코 휘둘리지 않는
우리의 선명한 신앙의 기본기가 될 것입니다.
*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6:20)
바울은 갇혀 있다고 복음이 위축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몸이 제한되거나 제약을 받으면
그 모든 말도 제한될 걸로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육체를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즉,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내가 건강해야만,
내가 좀 부유해야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과신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약해도 복음만은 진정한 능력입니다.
복음만이 그 사람을 살리는 능력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 부활만이 죽은 심령을 회복하는 유일한 능력입니다.
그 어떤것도 복음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아무리 별이 반짝거려도 태양이 뜨면 아무것도 아니듯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갇혀 있지만
자신의 처지에 대해 원망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동역자들을 더 격려하고
그들이 복음 안에 하나 될 것을 간절히 원합니다.
잘못을 지적하거나 책망하는 것이 아닌 우리에게 주신
이 복음을 통해 누리는 놀라운 자유와 부여된 신분,
그리고 놀라운 감격을 회복하고 함께 복음을 위해서
헌신할 것을 간곡히 부탁하고 있습니다.
나는 약하지만 주는 강하십니다.
그 주님이 더더욱 복음의 영향력을 드러낼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그 하나님의 열심히 전 우주까지
그 복음의 확장을 이루고야 마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만이 유일한 소망이며,
복음만이 세상을 회복하는 유일한 능력입니다.
매 순간 이 복음을 가슴 속에 담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다시 한번 견고하게 우리 신앙을 재구축하고
감동으로 하나님께 응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부 11시 현장예배.....
7시 1부 그레이스 엔젤스 현장예배......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엡6:19—24)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6:20)
*당당한 죄수(?)--로마로 압송 당하기 바로 직전에
가이사랴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던 현장
사도 바울은 로마에 1차 구금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는 복음 때문에 로마까지 끌려왔고,
지금 기약 없는 구금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가슴 속에는 복음을 향한 거룩한 열정과 공동체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 가득했다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26장을 보게 되면 바울이 2년 동안 가이샤에
구금되어 있다가 로마로 압송 당하는 과정들이 나타나는데
그중 하나의 사건이 재판을 받는 장면입니다.
가이사의 법정에서 그는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2세 왕 앞에서 재판을 받지만
그는 자신만만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것은 사람을 향한 용기가 아니라 복음에 대한 자신감 복음에 대한 확신이었고
그것은 그가 변증하는 시간 시간마다 가득 드러나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쇠사슬에 매인 죄수의 몸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현실
베스도는 모든 과업들을 척결해야 되는 상황에서
가장 큰 문제가 바울을 재판하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을 정죄하는 수많은 유대인들의 상소가 올라와 있었지만
바울을 정죄할 만한 근거는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기 때문에
결국 전임 총독 벨릭스도 시간만 끌다 내 버려두고 떠나버렸던 것입니다.
새로 부임한 베스도는 유대인들의 요구를 들어줌으로써
그들과의 관계를 순탄하게 이어 갈것이냐 아니면 갈등을 빚느냐를
고민한 결과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이 재판에 아그립바 2세라는 젊은 왕을 초청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이 정죄 받고 그에 따른 형량 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재판에 참석한 유대인들의 열망 속에서 바울은 최후 변론에서 복음만을 증가합니다.
* 자신에게 주어진 최후 변론 시간-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되심을 증거
마지막으로 주어진 최후 변론에서 왜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담담하게 증언합니다.
바울 자신 또한 과거에는 핍박자였고
수많은 크리스찬들을 철저하게 배척했으며 옥에 넘기고
죽이기도 했음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과거였습니다.
자신을 고발하는 유대인들처럼 자신도 열심을 다해 복음을 대적했던 그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영혼의 눈을 떴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예수께서
나의 구원자임을 확신하게 되었고 이제 이 복음을 위하여
지금까지 헌신하는 삶을 살아왔음을 증거 합니다.
*분봉왕 아그립바 2세--“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는도다”(행26:27)
바울은 아그립바 2세 왕에게 담대히 묻습니다.
‘아그립바 왕이시여! .
당신은 이 십자가 사건을 알지 않습니까?’
아그립바 2세 왕은 바울의 질문에 난처했습니다.
대답을 해야 했지만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는 유대의 분봉왕이기 때문에 모든 역사적인
사실을 다 알고 있었고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반박하기 상당히 껄끄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베스도가 외칩니다,.
*죄수가 되어 베스도 총독에게 답변하는 바울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했구나“(행26:24)
바울은 답변합니다. ‘베스도 총독 각하,
내가 미친 것이 아니라 진실로 바르고 정신 차린 말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현실적으로 일어났던 사건을 당신에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미쳐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저는 지금 진정한 하나님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 아니라 오늘 이 자리에서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행26:29)
*바울의 로마 행(행27-28장)
이것이 바울의 복음 증거였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을 ’예수‘라는 나쁜 질병을 퍼뜨리는 ’염병‘으로 매도합니다.
그를 공격했고 어떻게든 그를 정죄하고자 하지만 바울은 자신을 변호하는데
급급한 것이 아니라 예수 십자가 죽으심,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임을 담담하게 증언합니다. 그리고는 황제 앞에서의 재판을 청구합니다.
바울은 결국 로마까지 압송을 당하게 되고 우리가 잘 알듯이 광풍을
만나 죽을 뻔한 위기를 겪게 됩니다. 로마에 도착한 후에는 기약 없는
구금 생활이 이어집니다.
*무심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여러분 한번 연상해 보세요. 하나님만 의지하며
이런 고난과 파란만장한 다양한 기적과 역사를 경험하면서
로마까지 왔다면 그 이후에 어떤 스펙타클한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까 기대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역사는커녕, 바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기약 없이
갇힌 채로 2년 동안 옥에 갇혀서 들어오는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엡6:19)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가 이해 못 할 부분이 많습니다.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3주 동안 삶의 희망이 끊어졌을 때,
바울의 기도를 통해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함께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신다
약속했으니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리라고 안심시키고 격려합니다.
얼마 후 몰타라는 섬에 도착해 구원을 얻은 후 독사에
물려 원주민들로부터 흉악한 죄인으로 몰리지만 독이 퍼지지 않는
바울을 다시 신으로 섬기려 할 때 그들을 멈추게 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섬겨야 할 대상임을 전하며 복음전합니다.
그때 보블리오라 하는 추장의 아버지가 병들자 그를 고쳐줌으로써
그곳의 많은 원주민들이 예수를 믿고 크리스찬으로
가득한 섬으로 바뀌게 되는 역사를 경험합니다 .
이런 역사가 있었으면 로마에 가서도 뭔가
큰 역사가 나타날 것이라
어쩌면 바울도 은근히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동역 자들에게 부탁하는 중보기도
결국 로마까지 가서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상황속 에서도
바울이 가는 곳곳에는 자신을 맞이해주고 격려하고 축복하는
많은 동역자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동역자들을 통해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마음의 담력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비록 현실은 2년 동안 갇힌 채로 세월만 야속하게 흘러가고 있었지만
그곳에서도 바울은 유대 지도자들을 초청해서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일지
거부할지에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복음을 증거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냈습니다.
2년 동안 갇혀 있다가 잠깐 풀려나서 6개월 동안 자유의 몸이 되지만
또다시 체포되어 바울은 결국 네로 황제 때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버립니다.
옥중서신 중 하나인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울이 죽음을 맞이하기
불과 1년전 이었습니다. 기약 없는 현실은 계속되고 있었고
황제가 나를 불러 재판을 무효화시키고 자유를 주지 않을까? 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상황은 점점 악화 되어 갔습니다.
게다가 복음으로 세웠던 공동체에 대해 들려오는 소식은
상당히 부정적이었고 비관적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전심으로 기도하며 성령의 감동으로 서신서를 보냅니다.
우리가 새벽마다 함께 나누었던 골로새서가 바로 그 내용입니다.
바울이 에베소교회를 3년 동안 섬기며 떠날 때 부탁한 내용은
자신이 떠난 다음 흉악한 이리가 들어와 주께서 피로서 값 주고
사신 이 교회를 삼키지 않을까 걱정하며 그는 이렇게 당부합니다.
’ 여러분! 3년 동안 여러분에게 전한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범사의 본을 보이고 진정 하나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달했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지만 이 공동체는 얼마 가지 못해 이단의 공격,
즉 니골라당의 교훈을 받고 와해되어갑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실 것은 어차피 우리 영혼뿐이니 가뜩이나
힘든 삶 속에서 육체는 적당히 방종해도 괜찮다 라는
달콤한 소리가 에베소 교인들의 영혼을 서서히 유린 하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몸은 사슬에 매어 있을지라도 복음만은 매이지 않도록.....
우리가 너무나 잘 알듯이 바울은
1장에서 우리가 어떤 신분인지를 드러냅니다.
그 목적이 우리로 하여금 그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바울은 선언합니다.
부부 생활도 바로 예배이고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도 예배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만나는 직장 상사와 부하직원과의
모든 관계도 다 예배의 현장임을 바울은 우리 앞에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현장이 예배입니다.
지금 바울은 이 복음 때문에 갇혀있고
또 갇혀있음에도 끊임없이 복음을 위해
스스로 최선을 다하고 공동체에게도 다시 복음으로 연합될 것을
간곡히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가고 바울 곁에 있던 사람들은 떠나갑니다.
로마서 12장을 보면 최소 36명 이상의 수많은 동역자가 함께
바울을 격려했고 또한 바울 곁에서 그와 사역했음을 볼 수 있지만
이제 하나 둘 그의 곁을 떠나가고 점점 회의감이 감도는 상황이
되어버린 현실입니다.
이렇게 점점 깊어지는 고난의 현실 속에서 떠나가는 동역자들을 보면서
참으로 먹먹했을 바울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이러한 상황속 에서도 바울은 자신의 고달픈 삶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고
오직 복음만이 제한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당부합니다.
사사로운 욕구도 자신의 이익을 위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복음을 향한 간절한 부탁이었습니다.
이 부탁 속에 기도만 담겨 있을까요.
여러분이 그 복음을 위해서 다시 한번 열심히 뛰어달라는
간절한 바람도 담겨 있을 것입니다.
그가 비록 갇혀 있지만 그럼에도 복음은 확산 될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는 이 말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상황이 힘들수록 우리는 인생에 관점을 바로 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눈을 들어 주를 보라’ 주를 바라보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관점이 되어야 합니다.
내 앞의 현실과 사람을 보면 절망할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현실과 사람을 바라봤다면 기약 없는 상황으로
절망하고 하나, 둘 떠나가는 그 사람들을 원망했을 것입니다.
어쩌먼 그것이 인간의 한계일지 모릅니다.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면서
우리는 다양한 한계를 만나게 됩니다.
그 한계는 나 자신일 수도 있고
타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한계에 다다를 때 절망하기보다는
나의 시선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 아니면 안 되는
우리의 삶에 대한 분명한 선언이 필요하다는 것을
재 인식 해야만 합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딤후 4:17)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자기 힘을 앞세워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보고자
일어났을 때 그의 나이 40세였습니다. 그는 파라오의 공주의 아들이며
모든 애굽의 학문을 다 배웠기에 통치할 만한 자격이 있다고
스스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루 아침에 그는 살인자, 실패자가 되어
광야를 떠돌아다니는 인생으로 전락합니다.
무려 사십 년 동안 그의 운명은 가혹한 현실에 내몰리게 되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한 채 그는 은근히 원망했습니다.
모든 것을 가졌다고 자신했던 40세에도 실패했는데
80세 노인이 된 지금 그 위대한 과업을 이루기에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고백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놀랍게도 그때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는 그를 통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닐 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께 시선을 두고 하나님을
더욱더 바라보고 의지하고 신뢰하며 인생의 방향을 잡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7절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 자신의 능력, 힘을 과시하는 게 아니라 그를 도우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모든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명에 집중하라!
‘하나님 나는 그저 그릇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시면 내가 사용되겠지만
사용하지 않으면 나는 용도 폐기될 수밖에 없는 질그릇에 불과합니다!
질그릇 자체가 무슨 능력이 있으며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고린도후서 4장을 보면
’우리가 이 질그릇에 보배를 담았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담고 항상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을 살면
가치 있는 존재가 되지만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시선을 집중하지 않고
세상의 가치관으로 철저하게 전락해 버리면 우리는 그저 쓸모없는
질그릇에 불과한 것입니다. 깨져서 쓸모없는 질그릇 일수록,
상황이 어렵고 힘들수록 하나님 앞에 더 집중해야 되고
내게 베푸신 사명이 뭔가에 대해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명이 있는 한 죽지 않습니다!‘
위험한 건, 사명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사명이 있는 한 우리는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바울은 사명이 있었습니다. 도대체 그 위대한 바울의 삶은 왜 저럴까.
복음 때문에 로마까지 왔는데 복음을 확장시키기는 커녕
사슬에 매이고 갇혀 있는 그의 초라한 모습, 사슬의 매인 모습을 보며
바울 곁을 지켰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가는 상황에서도
바울은 그들에게 사슬에 매인 자신 때문에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오히려 복음 때문에 자랑하고
복음 때문에 더 거룩한 열정을 드러낼 것을 간곡히 부탁합니다.
목적이 중요하고 본질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 얼마나 더 많이 알고 있는나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존재케 한다는 것,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그 은혜가 존재케 한다는 것, 그것만이 결코 휘둘리지 않는
우리의 선명한 신앙의 기본기가 될 것입니다.
*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6:20)
바울은 갇혀 있다고 복음이 위축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몸이 제한되거나 제약을 받으면
그 모든 말도 제한될 걸로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육체를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즉,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내가 건강해야만,
내가 좀 부유해야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과신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약해도 복음만은 진정한 능력입니다.
복음만이 그 사람을 살리는 능력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 부활만이 죽은 심령을 회복하는 유일한 능력입니다.
그 어떤것도 복음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아무리 별이 반짝거려도 태양이 뜨면 아무것도 아니듯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갇혀 있지만
자신의 처지에 대해 원망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동역자들을 더 격려하고
그들이 복음 안에 하나 될 것을 간절히 원합니다.
잘못을 지적하거나 책망하는 것이 아닌 우리에게 주신
이 복음을 통해 누리는 놀라운 자유와 부여된 신분,
그리고 놀라운 감격을 회복하고 함께 복음을 위해서
헌신할 것을 간곡히 부탁하고 있습니다.
나는 약하지만 주는 강하십니다.
그 주님이 더더욱 복음의 영향력을 드러낼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그 하나님의 열심히 전 우주까지
그 복음의 확장을 이루고야 마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만이 유일한 소망이며,
복음만이 세상을 회복하는 유일한 능력입니다.
매 순간 이 복음을 가슴 속에 담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다시 한번 견고하게 우리 신앙을 재구축하고
감동으로 하나님께 응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