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기자부
작성일
2021-08-15 10:22
조회
1232
8월15일 주일 2부 ㅡ5부 온라인예배
9시 2부 온라인예배
2시.... 5부. 청년부 온라인예배
‘감동을 상실한 시대!'(눅7:31-35)
*신앙생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행동하신 놀라우신
은혜에 대한 감동으로 반응하는 전 인격
신앙생활은 좀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모든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은혜이며 그 은혜에 대한 특별한 감사와 감동으로
끊임없이 반응하는 전인격!
이것이 신앙생활의 진정한 면모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셔서 구원을 주셨고
전적으로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은혜이며 그 은혜와 사랑 안에서
항상 감동으로 반응하는 우리의 전 인격과 전 삶을 ’신앙생활‘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 생활도, 신앙의 연조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감동이 없다면 부수적인 모든 것들은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5장을 보면 우리가 어떤 존재였는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우리에게 소중한가를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6,8,10)
*가망 없던 죄인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 되었은 즉‘이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과거 우리의 모습입니다. 아직 연약할때에,
경건치 않은 자. 죄인, 원수 되었을때에...
절망적인 과거의 우리 모습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로마서 1:28-32)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우리 앞에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
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3:9-10,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라(롬5:31)
이것이 우리의 실존입니다.
어떤 공로도 어떤 우리의 행위나 종교성도 우리는 하나님의 정죄함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우리가 ‘죄성’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시는 Good News가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17)
이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예수를 믿어야만 우리가 구원을 얻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게 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로마 공동체에게
강력하게 선언합니다. 이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바램이기도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살아갔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로마서 4장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일생이 등장합니다.
로마서는 그의 모든 신앙을 다소 과장되게 표현합니다,
원래부터 칭찬받을 만한 믿음인 것처럼 우리 앞에 드러 내지만
창세기 10장부터 그의 인생을 추적해 보면 신앙의 어두운 이면이 드러나죠.
안타깝지만 그가 얼마나 약하고 죄 성을 가진사람 이었는지가 드러납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아브라함은 본래부터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사이였다는 자긍심을 갖고 있었지만
창세기에서 드러나는 그의 모습은 우리와 다름 없는 연약한
존재였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 아브라함의 부르심(창12장)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내셔서 하란 땅까지 오게 하시고
그의 아버지 데라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
하나님은 다시 그를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기근을 면하기 위해서 이집트로 이주해버리고
거기서 자기 아내를 파라오와 거래하는 그의 죄 성을 드러냅니다.
자신의 생명을 얻고자 아내를 팔아버리는 악행을 저지르고 맙니다.
* 롯과의 결별, 살렘왕 멜기세덱과의 만남 장(창13~14장)
13장은 아브라함이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서 사랑하는
조가 룻과 결별을 합니다. 그 후 14장에 보면 가나안의 왕 그돌라오멜이
소돔과 고모라를 침략해서 모든 백성들을 사로잡아갈 때에
조카 롯도 포함 돼 있었고 롯을 구하고자 아브라함은 가신들을 이끌고
급습해 물리치고 잡혀갔던 사람들을 다시 되찾아 돌아옵니다.
그때 놀라운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것은 살렘왕 멜기세덱과의 만남이었습니다.
20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창세기 14:18-20)
즉, 온 우주 만물의 주권자자이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달라는 선언입니다.
이 살레망 멜기세덱은 그 당시 존재하지 않았던 나라의 왕입니다.
이분이 누구일까. 히브리서 6장 20절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히브리서 6:20)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신 그 살렘왕 멜기세덱은 바로 예수님의 현영,
즉, 육체를 입으신 예수님의 모습 이었습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축복합니다. 아브라함은 그분에게 십의 일조를 드립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주권과 공급에 대한 감동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내 인생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모든 승리도 나의 모든 인생의 축복도 하나님이 베푸신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 스스로의 생명을 내건 언약,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창15~16장)
15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자녀를 줄 것이다. 내 생명을 걸고 언약하마’ 하지만
16장으로 가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을 잊고 하갈이라고 하는
이집트 여자를 통해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그리고 13년 가까이 하나님과 단절된 시간을 보냅니다.
*할례의 제정(창17장)
17장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임재하셔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전능하신 여호와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그를 책망하시고 할례를 행할 것을 명하십니다.
자신의 생식기 끝을 잘라냄으로써 ‘나는 죽었다’를 선언하게 하십니다.
* 아브라함에게 독자를 주실 것을 예고,
소돔과 고모라를 위한 아브라함의 중보와 심판(창18장 ~19장)
18장. 19장을 보면 그 후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장차 그에게 후사가 있을 것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에서 하나님이 심판 임할 것을 알려주시죠.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합니다.
결국 의인 열 명이 없어 이 도시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 그랄왕 아비멜렉과의 거래(창20장)
아브라함이 또다시 자신의 생명을 위해 아비멜렉에게
자기 아내를 누이라 속여 빼앗기게 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이 거기에 개입하셔서. 아비멜렉을 두렵게 하심으로
아내 사라를 다시 돌려보내게 하십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한계’였습니다.
언약을 받고 하나님의 생명을 내건 끊임없는 약속이 주어졌지만
그는 여전히 기회만 주어지면
육체의 본성을 드러내는 약한 존재였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의 의나 공로가 아니었습니다.
* 100세에 독자 이삭이 태어남(창21장)
*5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낳을 때에 백세라
6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창세기 21:5-6)
드디어 아브라함 100세 때 죽은 자와 방불한 아내 사라를 통해
독자 이삭이 태어납니다. 그 후 20년이 지나 독자 이삭을 저 모리아 땅,
산에서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에 그는 기꺼이 순종합니다.
이삭이 아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모든 생명을 담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의 의나 공로가 아니었다!
많은 사람이 아브라함의 순종을 바라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정말 좋았구나.
독자를 아낌없이 바쳤구나. 하지만 성경은 또한
그의 신앙의 이면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도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
믿음의 조상이라고 할 만한 사람입니까?
자기 생명을 잃을까 두려워 아내를 두 번이나 거래했고
하나님이 생명을 내건 언약을 주셨음에도 이방 여인을 취하여
아들을 얻고자 했던 사람이 이렇게까지 신앙의 정상에 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의로움일까?
그것은 그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배려와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는 압니다.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우월한 존재여서가 아니라
그를 향한 훨씬 더 크고 놀라우신 하나님의 사랑이 그에게 부어졌기에
이 정도의 신앙의 수준까지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드러남(로마서, 히브리서11장)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로마서 4:18-22)
정말 아브라함이 확신을 했나요?
약속을 의심치 않았습니까? 믿음이 견고히 섰습니까?
아닙니다! 은혜가 이것을 가능케 만들었습니다
그는 수없이 의심했고, 여러 번 약속에서 이탈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당신이 먼저 행하신 그 언약을 이루고야 마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행위도 그의 열심도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오직 은혜로....
*23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로마서 4:23-24)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로마서 5:1)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은 은혜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로 믿게 하셨고
그분의 십자가 죽으심, 부활이 나를 위한 것임을 믿게 하셨고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하신 이 모든 것이
우리의 혈통도 우리의 열심도, 종교성도 아닌 성령이 내 안에 오셔서 베푸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의 결과라는 것을 오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찬은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고 어떠한 선한 행위를 앞세우지 않고
오직 내게 베푸신 성령의 임재와 그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동으로
살아가는 그 전 인격과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었다고 해서 우리에게 환란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 인생에는 환란도 있고
좌절과 눈물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점은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우리는
주저앉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성을 더 완성해 나가는
성화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예수를 닮아가는 삶을 끊임없이 추구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 오직 은혜이기에 감사와 감동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전 삶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로마서 5:2-5)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 있어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장석주, 대추 한 알)
열매 하나도 그런 과정을 겪어야만 우리 앞에 아름답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자마자
당장 영광에 들어가고 모든 복을 받은 그런 삶을 사실은
허탄한 신화일 뿐,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처절한 과정이 있었습니다.
75세에 부름받아 믿음의 정상에 설 때까지 무려 5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하나님은 그와 함께하셨고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랑으로
끊임없이 보호하셨으며 결국 그 무조건적인 사랑에 감동되어서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조차도 아끼지 않는 신앙의 정상에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의도 공로도 아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그의 전적인 반응이었습니다.
*'비관주의자는 모든 기회 속에서 시련을 보고
낙관주의자는 모든 시련 속에서 기회를 본다.'
환란과 핍박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오직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에게도 비록 환란과 핍박과 질병,
눈물도 있지만 그것으로 주저앉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동되어서 끊임없이 십자가를 통해
성숙된 삶, 내가 더 성화되어가는 삶을 사는 것이
크리스찬의 삶의 진정한 면모라는 것을 성경은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감동--무엇인가 그 사건에 대하여 감사를 느끼는 전 인격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항상 감동이 존재해야 합니다.
저는 성령 충만을 또 다른 말로 ’감동‘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구속하시고 나를 자녀 삼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를 느끼는 전 인격으로 살아가는 그 모든 삶이
바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 그 당시의 시대상만이 아닌 이 시대의 모습(눅7:31-32)
오늘 본문에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동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귀신을 내쫓고 죽은 자를 살리고 수많은 병자를 고치시는
그야말로 많은 지혜와 회복의 역사를 드러내셨지만
그들은 온전히 예수를 비판합니다. 구원을 얻어야 된다고 선언하시는
그 말씀 앞에 그들은 분노하고 도전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모순된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의 삶 어디에도 감동은 없습니다. 오직 비판과 정죄만이 가득합니다.
*오직 비판 ,정죄
이 시대에 얼마나 많은 정죄와 비판, 갈등이 존재합니까?
은혜를 아는 사람들은 누군가를 비판하기에 앞서 자신을 성찰 합니다.
더 큰 죄인인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는데
겸비하여 더 감동하고 거룩한 축복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감동 받은 그리스도인의 특성
공로주의를 앞세운 사람은 비판이 많습니다.
그러나 은혜로 사는 사람들은 항상 감사로 삽니다.
나 같은 것을 구속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것을 바라보면
비판과 정죄가 아닌 저들을 불쌍히 여기실 것을
저들에게 은혜 베푸실 것을 간구하는 중보의 삶을 살게 됩니다.
신앙의 연조가 깊어갈수록 우리는 더 겸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았습니까?
우리가 정말 성령의 사람이라면 힘들고 어려운 이 시대에
때로는 울어야 하고, 때로는 웃어야 합니다.
감격도 인격도 그리고 감동도 사라져 자기 마음밖에는 없어
자신만이 모든 삶의 기준이고 모든 역사의 중심이 되는
그야말로 오만한 삶을 살 때가 참 많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요새 젊은이들에 대해 배타적이고 정죄함을 가진다면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감동이 없는 삶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나의 본 모습을 상실한 채, 마치 내 공로로 사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지난해부터 홀로 기도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이른 새벽, 아무도 없는 텅 빈 예배당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하셨습니다.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모든 삶을
반추하게 하신 적도 있었습니다. 또 깊이 그 현장 현장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을 주시기도 했습니다.
은혜 아니면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설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한다는 것은 성령 충만한 삶을 의미하며,
성령 충만함이란 매 순간순간을 감동으로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성령 충만은 감동하는 삶입니다.
날마다 감동 하기 위해서
항상 은혜 밑에 이렇게 거합니다.
저는 깨어져 새고 있는 그릇이기에 늘 흐르는 물 아래 거합니다.‘
더 감동으로 살아가길 사모하고 아무리 세상이 뒤흔들리고
척박해져도 여전히 우리 마음에는 은혜에 대한 감동이 존재하기에
세상을 향해 비판과 정죄가 아닌 그들에게 은혜가 없음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간구하는 중보의 마음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바리새인들처럼 나의 공로와 자랑으로
가득 찬 모습이 아니라 언제나 은혜에 대해서 사무치고
은혜를 더 갈망하며 감동하는 삶을 살기 위해 말씀 앞에
더 나아가 ’하나님 나는 깨진 그릇 같은 존재입니다!
제게 은혜를 더 부어주시고 감동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십시오!‘
기도해야 합니다,
열악하고 힘든 곤고한 상황이라도 환란은 연단을 연단은 인내를 인내는
소망을 이루듯이 더 주님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여전히 감동하며
살 수 있는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 우리의 전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시.... 5부. 청년부 온라인예배
‘감동을 상실한 시대!'(눅7:31-35)
*신앙생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행동하신 놀라우신
은혜에 대한 감동으로 반응하는 전 인격
신앙생활은 좀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모든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은혜이며 그 은혜에 대한 특별한 감사와 감동으로
끊임없이 반응하는 전인격!
이것이 신앙생활의 진정한 면모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셔서 구원을 주셨고
전적으로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은혜이며 그 은혜와 사랑 안에서
항상 감동으로 반응하는 우리의 전 인격과 전 삶을 ’신앙생활‘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 생활도, 신앙의 연조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감동이 없다면 부수적인 모든 것들은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5장을 보면 우리가 어떤 존재였는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우리에게 소중한가를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6,8,10)
*가망 없던 죄인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 되었은 즉‘이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과거 우리의 모습입니다. 아직 연약할때에,
경건치 않은 자. 죄인, 원수 되었을때에...
절망적인 과거의 우리 모습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로마서 1:28-32)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우리 앞에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
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3:9-10,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라(롬5:31)
이것이 우리의 실존입니다.
어떤 공로도 어떤 우리의 행위나 종교성도 우리는 하나님의 정죄함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우리가 ‘죄성’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시는 Good News가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17)
이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예수를 믿어야만 우리가 구원을 얻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게 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로마 공동체에게
강력하게 선언합니다. 이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바램이기도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살아갔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로마서 4장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일생이 등장합니다.
로마서는 그의 모든 신앙을 다소 과장되게 표현합니다,
원래부터 칭찬받을 만한 믿음인 것처럼 우리 앞에 드러 내지만
창세기 10장부터 그의 인생을 추적해 보면 신앙의 어두운 이면이 드러나죠.
안타깝지만 그가 얼마나 약하고 죄 성을 가진사람 이었는지가 드러납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아브라함은 본래부터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사이였다는 자긍심을 갖고 있었지만
창세기에서 드러나는 그의 모습은 우리와 다름 없는 연약한
존재였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 아브라함의 부르심(창12장)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내셔서 하란 땅까지 오게 하시고
그의 아버지 데라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
하나님은 다시 그를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기근을 면하기 위해서 이집트로 이주해버리고
거기서 자기 아내를 파라오와 거래하는 그의 죄 성을 드러냅니다.
자신의 생명을 얻고자 아내를 팔아버리는 악행을 저지르고 맙니다.
* 롯과의 결별, 살렘왕 멜기세덱과의 만남 장(창13~14장)
13장은 아브라함이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서 사랑하는
조가 룻과 결별을 합니다. 그 후 14장에 보면 가나안의 왕 그돌라오멜이
소돔과 고모라를 침략해서 모든 백성들을 사로잡아갈 때에
조카 롯도 포함 돼 있었고 롯을 구하고자 아브라함은 가신들을 이끌고
급습해 물리치고 잡혀갔던 사람들을 다시 되찾아 돌아옵니다.
그때 놀라운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것은 살렘왕 멜기세덱과의 만남이었습니다.
20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창세기 14:18-20)
즉, 온 우주 만물의 주권자자이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달라는 선언입니다.
이 살레망 멜기세덱은 그 당시 존재하지 않았던 나라의 왕입니다.
이분이 누구일까. 히브리서 6장 20절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히브리서 6:20)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신 그 살렘왕 멜기세덱은 바로 예수님의 현영,
즉, 육체를 입으신 예수님의 모습 이었습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축복합니다. 아브라함은 그분에게 십의 일조를 드립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주권과 공급에 대한 감동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내 인생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모든 승리도 나의 모든 인생의 축복도 하나님이 베푸신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 스스로의 생명을 내건 언약,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창15~16장)
15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자녀를 줄 것이다. 내 생명을 걸고 언약하마’ 하지만
16장으로 가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을 잊고 하갈이라고 하는
이집트 여자를 통해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그리고 13년 가까이 하나님과 단절된 시간을 보냅니다.
*할례의 제정(창17장)
17장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임재하셔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전능하신 여호와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그를 책망하시고 할례를 행할 것을 명하십니다.
자신의 생식기 끝을 잘라냄으로써 ‘나는 죽었다’를 선언하게 하십니다.
* 아브라함에게 독자를 주실 것을 예고,
소돔과 고모라를 위한 아브라함의 중보와 심판(창18장 ~19장)
18장. 19장을 보면 그 후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장차 그에게 후사가 있을 것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에서 하나님이 심판 임할 것을 알려주시죠.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합니다.
결국 의인 열 명이 없어 이 도시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 그랄왕 아비멜렉과의 거래(창20장)
아브라함이 또다시 자신의 생명을 위해 아비멜렉에게
자기 아내를 누이라 속여 빼앗기게 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이 거기에 개입하셔서. 아비멜렉을 두렵게 하심으로
아내 사라를 다시 돌려보내게 하십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한계’였습니다.
언약을 받고 하나님의 생명을 내건 끊임없는 약속이 주어졌지만
그는 여전히 기회만 주어지면
육체의 본성을 드러내는 약한 존재였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의 의나 공로가 아니었습니다.
* 100세에 독자 이삭이 태어남(창21장)
*5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낳을 때에 백세라
6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창세기 21:5-6)
드디어 아브라함 100세 때 죽은 자와 방불한 아내 사라를 통해
독자 이삭이 태어납니다. 그 후 20년이 지나 독자 이삭을 저 모리아 땅,
산에서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에 그는 기꺼이 순종합니다.
이삭이 아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모든 생명을 담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의 의나 공로가 아니었다!
많은 사람이 아브라함의 순종을 바라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정말 좋았구나.
독자를 아낌없이 바쳤구나. 하지만 성경은 또한
그의 신앙의 이면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도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
믿음의 조상이라고 할 만한 사람입니까?
자기 생명을 잃을까 두려워 아내를 두 번이나 거래했고
하나님이 생명을 내건 언약을 주셨음에도 이방 여인을 취하여
아들을 얻고자 했던 사람이 이렇게까지 신앙의 정상에 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의로움일까?
그것은 그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배려와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는 압니다.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우월한 존재여서가 아니라
그를 향한 훨씬 더 크고 놀라우신 하나님의 사랑이 그에게 부어졌기에
이 정도의 신앙의 수준까지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드러남(로마서, 히브리서11장)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로마서 4:18-22)
정말 아브라함이 확신을 했나요?
약속을 의심치 않았습니까? 믿음이 견고히 섰습니까?
아닙니다! 은혜가 이것을 가능케 만들었습니다
그는 수없이 의심했고, 여러 번 약속에서 이탈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당신이 먼저 행하신 그 언약을 이루고야 마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행위도 그의 열심도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오직 은혜로....
*23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로마서 4:23-24)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로마서 5:1)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은 은혜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로 믿게 하셨고
그분의 십자가 죽으심, 부활이 나를 위한 것임을 믿게 하셨고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하신 이 모든 것이
우리의 혈통도 우리의 열심도, 종교성도 아닌 성령이 내 안에 오셔서 베푸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의 결과라는 것을 오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찬은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고 어떠한 선한 행위를 앞세우지 않고
오직 내게 베푸신 성령의 임재와 그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동으로
살아가는 그 전 인격과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었다고 해서 우리에게 환란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 인생에는 환란도 있고
좌절과 눈물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점은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우리는
주저앉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성을 더 완성해 나가는
성화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예수를 닮아가는 삶을 끊임없이 추구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 오직 은혜이기에 감사와 감동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전 삶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로마서 5:2-5)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 있어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장석주, 대추 한 알)
열매 하나도 그런 과정을 겪어야만 우리 앞에 아름답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자마자
당장 영광에 들어가고 모든 복을 받은 그런 삶을 사실은
허탄한 신화일 뿐,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처절한 과정이 있었습니다.
75세에 부름받아 믿음의 정상에 설 때까지 무려 5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하나님은 그와 함께하셨고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랑으로
끊임없이 보호하셨으며 결국 그 무조건적인 사랑에 감동되어서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조차도 아끼지 않는 신앙의 정상에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의도 공로도 아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그의 전적인 반응이었습니다.
*'비관주의자는 모든 기회 속에서 시련을 보고
낙관주의자는 모든 시련 속에서 기회를 본다.'
환란과 핍박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오직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에게도 비록 환란과 핍박과 질병,
눈물도 있지만 그것으로 주저앉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동되어서 끊임없이 십자가를 통해
성숙된 삶, 내가 더 성화되어가는 삶을 사는 것이
크리스찬의 삶의 진정한 면모라는 것을 성경은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감동--무엇인가 그 사건에 대하여 감사를 느끼는 전 인격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항상 감동이 존재해야 합니다.
저는 성령 충만을 또 다른 말로 ’감동‘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구속하시고 나를 자녀 삼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를 느끼는 전 인격으로 살아가는 그 모든 삶이
바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 그 당시의 시대상만이 아닌 이 시대의 모습(눅7:31-32)
오늘 본문에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동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귀신을 내쫓고 죽은 자를 살리고 수많은 병자를 고치시는
그야말로 많은 지혜와 회복의 역사를 드러내셨지만
그들은 온전히 예수를 비판합니다. 구원을 얻어야 된다고 선언하시는
그 말씀 앞에 그들은 분노하고 도전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모순된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의 삶 어디에도 감동은 없습니다. 오직 비판과 정죄만이 가득합니다.
*오직 비판 ,정죄
이 시대에 얼마나 많은 정죄와 비판, 갈등이 존재합니까?
은혜를 아는 사람들은 누군가를 비판하기에 앞서 자신을 성찰 합니다.
더 큰 죄인인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는데
겸비하여 더 감동하고 거룩한 축복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감동 받은 그리스도인의 특성
공로주의를 앞세운 사람은 비판이 많습니다.
그러나 은혜로 사는 사람들은 항상 감사로 삽니다.
나 같은 것을 구속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것을 바라보면
비판과 정죄가 아닌 저들을 불쌍히 여기실 것을
저들에게 은혜 베푸실 것을 간구하는 중보의 삶을 살게 됩니다.
신앙의 연조가 깊어갈수록 우리는 더 겸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았습니까?
우리가 정말 성령의 사람이라면 힘들고 어려운 이 시대에
때로는 울어야 하고, 때로는 웃어야 합니다.
감격도 인격도 그리고 감동도 사라져 자기 마음밖에는 없어
자신만이 모든 삶의 기준이고 모든 역사의 중심이 되는
그야말로 오만한 삶을 살 때가 참 많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요새 젊은이들에 대해 배타적이고 정죄함을 가진다면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감동이 없는 삶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나의 본 모습을 상실한 채, 마치 내 공로로 사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지난해부터 홀로 기도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이른 새벽, 아무도 없는 텅 빈 예배당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하셨습니다.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모든 삶을
반추하게 하신 적도 있었습니다. 또 깊이 그 현장 현장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을 주시기도 했습니다.
은혜 아니면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설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한다는 것은 성령 충만한 삶을 의미하며,
성령 충만함이란 매 순간순간을 감동으로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성령 충만은 감동하는 삶입니다.
날마다 감동 하기 위해서
항상 은혜 밑에 이렇게 거합니다.
저는 깨어져 새고 있는 그릇이기에 늘 흐르는 물 아래 거합니다.‘
더 감동으로 살아가길 사모하고 아무리 세상이 뒤흔들리고
척박해져도 여전히 우리 마음에는 은혜에 대한 감동이 존재하기에
세상을 향해 비판과 정죄가 아닌 그들에게 은혜가 없음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간구하는 중보의 마음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바리새인들처럼 나의 공로와 자랑으로
가득 찬 모습이 아니라 언제나 은혜에 대해서 사무치고
은혜를 더 갈망하며 감동하는 삶을 살기 위해 말씀 앞에
더 나아가 ’하나님 나는 깨진 그릇 같은 존재입니다!
제게 은혜를 더 부어주시고 감동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십시오!‘
기도해야 합니다,
열악하고 힘든 곤고한 상황이라도 환란은 연단을 연단은 인내를 인내는
소망을 이루듯이 더 주님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여전히 감동하며
살 수 있는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 우리의 전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