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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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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4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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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9
2월14일 주일 1부 ㅡ 5부 온라인예배&현장예배 ㅡ'위기&기회!' (행8:1~6)
7시..... 1부 온라인예배 & 현장예배
2부 ...9시 온라인예배 & 현장예배
3부 ....11시 온라인예배 & 현장예배
'위기&기회!' (행8:1~6)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썩고 죽어야만 열매가 맺어질 수 있듯이
우리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가리켜 ‘한 알의 밀알’로 예표 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것이 주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죽어야 사는 놀라운 신비함이 우리 기독교 신앙 안에도 존재합니다.
때로는 ‘약해야만 강해지는 놀라운 하나님의 비밀’이
우리 인생 속에 존재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나갈 때마다 이 신비로움들을 경험합니다.
죽어야 사는 놀라운 신비로움, 약해야만
강해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 때로는 ‘실패해야만 성공하는 것’에
대한 진정한 가치관을 우리가 압니다.
*스데반의 순교로부터 더 촉발된 핍박
오늘 본문에서는 ‘죽어야 사는’ 또 ‘죽음을 통해
생명력이 파급’되는 하나님의 반전들이 등장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생명의 확장’임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스테반의 순교를 통해서
수많은 크리스찬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으로 피신합니다
그런데 피신하는 곳마다 생명의 복음이 함께 역사하고
하나님의 생명력이 파급되는 현장들을 오늘 본문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핍박자 사울의 전면 등장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사도행전 7:58)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8:1)
스데반은 돌에 맞아 무고한 희생의 제물이 되어 순교를 당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생명력이 파급되어가는 신비한 사건들이 나타납니다.
즉, ‘죽어야 사는.. 고통을 통해 파급되는 복음의 위대한 생명력’입니다.
*스데반 죽이기에 앞장선 분노한 핍박자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한 선동가. 그것은 바로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바리새인의 석학이자 유대인 중에 가장 흠모할 만한
공회의 의원으로 세우고 싶어했던 아버지의 열망으로
당시 유명한 대학들이 있었던 ‘다소’라는 지역에 유학온
바리새인의 학문을 배우고 있었던 청년이었습니다.
그의 ‘지나친 열심’은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스데반을 향해 악감정을 품게 했고 모든 믿는 크리스찬에게 분노케 해서
그는 어떻게든 그들을 모두 잡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 생각하여 스스로 핍박의 최선봉에 서게 됩니다.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데 앞장은 섰지만
그의 설교는 그의 가슴속에 ‘큰 반향’을 일으켰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때’가 아니었습니다.
아직 그는 복음을 대적하는 ‘분노한 핍박자’에 불과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와 그의 순교, 아름답고 거룩한 최후!
‘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사도행전 7:55-60)
스테반 집사의 순교의 모습입니다.
이 아름다운 최후를 지켜보는 사울에게는 큰 충격이었지만
여전히 그는 분노해서 ‘죽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스데반의 죽음을 배척합니다. 아직은 ‘하나님의 때’가 아니었습니다.
*악인의 핍박을 통한 복음의 전파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사도행전 8:1)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잠언 16:4)
하나님의 ‘경세론’, 즉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는 방법중 하나는
의인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때로는 악인를 통해서도
하나님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심판받아 마땅하며 철저하게 징벌받아야 할
그런 악한 존재를 통해서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고야 마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이러한 다양한 현장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압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만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이 과연 계시는 걸까,
어찌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그런 고통을 당하게 하실까’
낙심할 수도 있지만, 그 가려진 의미를 깊이 들여다보면
그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사역’의 현장들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알듯이 기원전 720년 아시리아에 의해서 북방 에브라임은
초토화돼서 전 세계에 흩어집니다. 또 586년 남방유다도 바벨론에게 무너집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전 세계에 흩어지고 끌려갈 때는
‘하나님은 계신가, 우리를 잊으셨는가’ 생각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훗날 사도 바울를 통해서 복음이 증거되는 모든 현장들이
과거 아시리아인들이 흩어져 살던 북방 에브라임의 후손들과
바벨론에 의해 흩어졌던 남방 유다 백성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고,
아시리아와 혼혈 된 유대민족들이 살던 지역이 사마리아였습니다.
그곳에 또다시 복음이 증거되는 ‘위대한 반전들’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근시한 적이라 오늘만 보지만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좋지 않은 어떤 것들도 하나님은 당신의 뜻 안에서
적합하게 통치하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핍박을 통해 영역과 경계선이 무너지다.
스데반이 순교 당합니다.
사울은 강렬한 핍박자의 모습으로 많은 크리스찬을 향해 도전합니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사도행전 8:1)
스데반 집사의 순교로 복음의 시발점이 되어 모든 크리스찬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고 사도 이후에는 유대와 사마리아 땅까지 흩어져,
어떻게 보면 철저하게 지켜오던 ‘영역’을 벗어나게 됩니다.
영역이 파괴됩니다. 분명히 핍박이었고 혼란이었지만 복음의 장애물이 되었던 ‘
경계선’은 무너지게 됩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사도행전 1:8)
예수님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루살렘과 유다 외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유대민족만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며 구원 하신다’는
‘선민사상’에 철저하게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조차도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고 그 복음의 영역은
예루살렘과 유대까지밖에는 더 이상 확장되지 못했습니다.
사마리아는커녕 ‘땅끝까지’는 결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서
이 모든 견고한 벽들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복음의 ‘영역’을 깨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쌔
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사도행전 8:4-5)
*핍박을 통해 흩어지고 사마리아 땅으로 복음이 전해짐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러 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마리아는 그들에게 아주 천한 땅이었습니다.
과거 앗수르와 유대 여인 사이에서 나온 혼혈 민족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들을 천하게 보고 상종치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지나가실 때에도 제자들은 굉장히 못마땅히 여깁니다.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구원하시며 위대한 당신의
구원계획을 드러내시는데도 제자들은 감동하지 않을 때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단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것이니라.’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사마리아도 언젠가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될 것이며
그들에게도 복음이 증거되어서 하나님께 돌아오는
위대한 역사를 이루게 될 것’임을 제자들에게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집사 빌립의 전도 ㅡ사마리아
성령이 임하시고 증인을 삼고 예루살렘이 복음으로
가득 채워지는 상황에서도 사마리아는 천하다 여겨졌기 때문에
복음전파에 있어서도 전혀 관심 밖의 땅이었습니다.
그 영역에는 발을 들이지도 않았을 뿐 더러 그곳을 지나가지도 않았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비로소 ‘핍박’을 통해 크리스찬은 흩어지고
그 모든 담이 무너지고 사마리아를 향해 빌립 집사가 가게 됩니다,
*질병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회복과 복음증거
질병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이 있습니다.
바로 ‘관게회복, 화해, 하나됨, 그리고 복음증거’입니다.
우리는 현실에 급급합니다. ‘고통’ 그 자체에만 괴로워합니다.
하지만 그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더 큰 영역이 있습니다. 결국 가족과 이웃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파급시키는 것이 하나님 당신의 뜻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이렇게 코로나 펜데믹 사태에서 교회는 더 무릎 끓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헤아려야 하고 진정 겸손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 교회다운 모습으로 복음을 증거하고
세상을 품는 그 마음을 세상이 알 수 있도록 정말 겸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그 모든 기회를 오용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문제와 갈등이 많은 공동체는 결국 ‘본질의 힘’을 쓰지 못합니다.
복음에 힘을 쓰고 복음을 어떻게든 파급시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복음과는 상관없는 엉뚱한 일에 자신의 모든 생각과 관심을 쏟을 때가 많습니다.
믿음의 공동체의 본질, 핵심은 ‘복음증거’입니다.
우리 개개인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통해 하나님의 복음이 증거되고 하나님의 생명력이
확산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한 삶의 원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사도행전 8:5-8)
빌립이 복음 증거 할 때 강력한 역사가 나타납니다.
귀신이 떠나가고 병자들이 낳고 치유되는 현상들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복음증거의 역동성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온 우주의 통치자이십니다.
당신의 주권과 당신의 통치를 드러내기 원하십니다.
그것은 ‘복음증거’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가족과 이웃에게 복음 증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를 선포하는
가장 소중한 핵심이라는 것을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디모데후서 4:1-2)
복음증거는 ‘선택’이 아닌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복음증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절대 목적 입니다
구원 얻었으면 전해야 합니다.
구원 얻었다면 ‘구원 시키기’ 위해서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크리스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요구라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루살렘 공동체에 왜 이러한 핍박이 주어졌을까요?
물론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은 결코 복음을 위해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에게만 복음이 증거됐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의식이 여전히 강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력을 파급시키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전 세계에 파급시킨 이유는
바로 그들의 잘못된 ‘선민사상’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나라의 속국이 됐음에도 자신들만 하나님의 백성이라
생각하는 ‘민족 우월주의’에 빠져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전 세계에 흩어버리셨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항상 서로 말씀 앞에 연합하고
성장하면 또 흩어지고 끊임없이 생명을 파급시켜야 합니다.
교회 안의 소그룹의 목적은 흩어짐에 있고 생명력을 파급시키는 게 있습니다.
*핍박자 사울이 복음의 주역이 되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점이 생깁니다.
왜 복음을 위해 신앙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준비된
바나바가 아닌 핍박자인 사울이 세워졌을까요?
바나바는 사울의 옆에서 서포트하는 조력자가 됩니다.
우리는 1인자 에게 항상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지만
하나님은 바나바와 같은 좋은 사람을 통해서 사울을 ’바울 되게‘ 만드십니다,
나중에 보면 바나바가 아니었다면 사울은 위대한 사도로서의
역량을 발휘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을 세우고 사울과 함께 파송하고
사울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파급시키는 조력자로 서게 됩니다.
마치 바나바는 ’성령‘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오셔서 당신을 드러내기보다는
예수를 믿고 고백하게 하시고 성부 하나님을 우리가 고백하도록
도우시는 철저히 ’조력자‘의 역할을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의 사람 같은 사람, 교역하는 사람‘인 바나바의 도움으로
핍박자 사울이 역사의 무대에 섭니다. 이 사람이 복음을 통해서 변화되고
생명의 복음을 파급시키는 위대한 사도로서 세상 속에서
벽을 깨뜨리고 편견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생명을 파급시키는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 갑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경험하게 하는 신비로운 원동력
누군가에게 복음증거 할 때 나타난 위대한 생명력,
가족들에게 복음증거 할 때 나타나는 하나님의 생명력!
우리가 이웃에게 복음 증거할 때 나타나는
하나님의 위대한 생명력! 그것이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며
크리스찬들의 진정한 삶의 동력입니다.
우리는 예배 회복을 기대합니다.
하나님 앞에 함께 감동의 예배를 다시 한번 드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흩어져 있을 때,
예배가 단절되고 이렇게 함께 모이지도 못할 때,
가정에서부터 복음이 증거되고 이웃에게도 복음이 증거되어
하나님의 복음이 확장되는 현장을 함께 공유한다면
언젠가는 지금의 이 모든 고난과 역경들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위대한 반전이 되는 현장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름받은 특권에만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왜 보내셨을까.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다시 한번 점검해서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응답하고
순복하는 바로 그 공동체, 크리스찬으로 세워져 가길 간절히 바랍니다.
2부 ...9시 온라인예배 & 현장예배
3부 ....11시 온라인예배 & 현장예배
'위기&기회!' (행8:1~6)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썩고 죽어야만 열매가 맺어질 수 있듯이
우리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가리켜 ‘한 알의 밀알’로 예표 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것이 주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죽어야 사는 놀라운 신비함이 우리 기독교 신앙 안에도 존재합니다.
때로는 ‘약해야만 강해지는 놀라운 하나님의 비밀’이
우리 인생 속에 존재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나갈 때마다 이 신비로움들을 경험합니다.
죽어야 사는 놀라운 신비로움, 약해야만
강해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 때로는 ‘실패해야만 성공하는 것’에
대한 진정한 가치관을 우리가 압니다.
*스데반의 순교로부터 더 촉발된 핍박
오늘 본문에서는 ‘죽어야 사는’ 또 ‘죽음을 통해
생명력이 파급’되는 하나님의 반전들이 등장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생명의 확장’임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스테반의 순교를 통해서
수많은 크리스찬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으로 피신합니다
그런데 피신하는 곳마다 생명의 복음이 함께 역사하고
하나님의 생명력이 파급되는 현장들을 오늘 본문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핍박자 사울의 전면 등장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사도행전 7:58)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8:1)
스데반은 돌에 맞아 무고한 희생의 제물이 되어 순교를 당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생명력이 파급되어가는 신비한 사건들이 나타납니다.
즉, ‘죽어야 사는.. 고통을 통해 파급되는 복음의 위대한 생명력’입니다.
*스데반 죽이기에 앞장선 분노한 핍박자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한 선동가. 그것은 바로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바리새인의 석학이자 유대인 중에 가장 흠모할 만한
공회의 의원으로 세우고 싶어했던 아버지의 열망으로
당시 유명한 대학들이 있었던 ‘다소’라는 지역에 유학온
바리새인의 학문을 배우고 있었던 청년이었습니다.
그의 ‘지나친 열심’은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스데반을 향해 악감정을 품게 했고 모든 믿는 크리스찬에게 분노케 해서
그는 어떻게든 그들을 모두 잡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 생각하여 스스로 핍박의 최선봉에 서게 됩니다.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데 앞장은 섰지만
그의 설교는 그의 가슴속에 ‘큰 반향’을 일으켰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때’가 아니었습니다.
아직 그는 복음을 대적하는 ‘분노한 핍박자’에 불과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와 그의 순교, 아름답고 거룩한 최후!
‘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사도행전 7:55-60)
스테반 집사의 순교의 모습입니다.
이 아름다운 최후를 지켜보는 사울에게는 큰 충격이었지만
여전히 그는 분노해서 ‘죽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스데반의 죽음을 배척합니다. 아직은 ‘하나님의 때’가 아니었습니다.
*악인의 핍박을 통한 복음의 전파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사도행전 8:1)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잠언 16:4)
하나님의 ‘경세론’, 즉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는 방법중 하나는
의인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때로는 악인를 통해서도
하나님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심판받아 마땅하며 철저하게 징벌받아야 할
그런 악한 존재를 통해서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고야 마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이러한 다양한 현장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압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만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이 과연 계시는 걸까,
어찌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그런 고통을 당하게 하실까’
낙심할 수도 있지만, 그 가려진 의미를 깊이 들여다보면
그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사역’의 현장들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알듯이 기원전 720년 아시리아에 의해서 북방 에브라임은
초토화돼서 전 세계에 흩어집니다. 또 586년 남방유다도 바벨론에게 무너집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전 세계에 흩어지고 끌려갈 때는
‘하나님은 계신가, 우리를 잊으셨는가’ 생각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훗날 사도 바울를 통해서 복음이 증거되는 모든 현장들이
과거 아시리아인들이 흩어져 살던 북방 에브라임의 후손들과
바벨론에 의해 흩어졌던 남방 유다 백성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고,
아시리아와 혼혈 된 유대민족들이 살던 지역이 사마리아였습니다.
그곳에 또다시 복음이 증거되는 ‘위대한 반전들’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근시한 적이라 오늘만 보지만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좋지 않은 어떤 것들도 하나님은 당신의 뜻 안에서
적합하게 통치하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핍박을 통해 영역과 경계선이 무너지다.
스데반이 순교 당합니다.
사울은 강렬한 핍박자의 모습으로 많은 크리스찬을 향해 도전합니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사도행전 8:1)
스데반 집사의 순교로 복음의 시발점이 되어 모든 크리스찬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고 사도 이후에는 유대와 사마리아 땅까지 흩어져,
어떻게 보면 철저하게 지켜오던 ‘영역’을 벗어나게 됩니다.
영역이 파괴됩니다. 분명히 핍박이었고 혼란이었지만 복음의 장애물이 되었던 ‘
경계선’은 무너지게 됩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사도행전 1:8)
예수님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루살렘과 유다 외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유대민족만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며 구원 하신다’는
‘선민사상’에 철저하게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조차도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고 그 복음의 영역은
예루살렘과 유대까지밖에는 더 이상 확장되지 못했습니다.
사마리아는커녕 ‘땅끝까지’는 결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서
이 모든 견고한 벽들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복음의 ‘영역’을 깨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쌔
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사도행전 8:4-5)
*핍박을 통해 흩어지고 사마리아 땅으로 복음이 전해짐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러 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마리아는 그들에게 아주 천한 땅이었습니다.
과거 앗수르와 유대 여인 사이에서 나온 혼혈 민족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들을 천하게 보고 상종치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지나가실 때에도 제자들은 굉장히 못마땅히 여깁니다.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구원하시며 위대한 당신의
구원계획을 드러내시는데도 제자들은 감동하지 않을 때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단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것이니라.’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사마리아도 언젠가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될 것이며
그들에게도 복음이 증거되어서 하나님께 돌아오는
위대한 역사를 이루게 될 것’임을 제자들에게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집사 빌립의 전도 ㅡ사마리아
성령이 임하시고 증인을 삼고 예루살렘이 복음으로
가득 채워지는 상황에서도 사마리아는 천하다 여겨졌기 때문에
복음전파에 있어서도 전혀 관심 밖의 땅이었습니다.
그 영역에는 발을 들이지도 않았을 뿐 더러 그곳을 지나가지도 않았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비로소 ‘핍박’을 통해 크리스찬은 흩어지고
그 모든 담이 무너지고 사마리아를 향해 빌립 집사가 가게 됩니다,
*질병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회복과 복음증거
질병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이 있습니다.
바로 ‘관게회복, 화해, 하나됨, 그리고 복음증거’입니다.
우리는 현실에 급급합니다. ‘고통’ 그 자체에만 괴로워합니다.
하지만 그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더 큰 영역이 있습니다. 결국 가족과 이웃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파급시키는 것이 하나님 당신의 뜻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이렇게 코로나 펜데믹 사태에서 교회는 더 무릎 끓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헤아려야 하고 진정 겸손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 교회다운 모습으로 복음을 증거하고
세상을 품는 그 마음을 세상이 알 수 있도록 정말 겸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그 모든 기회를 오용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문제와 갈등이 많은 공동체는 결국 ‘본질의 힘’을 쓰지 못합니다.
복음에 힘을 쓰고 복음을 어떻게든 파급시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복음과는 상관없는 엉뚱한 일에 자신의 모든 생각과 관심을 쏟을 때가 많습니다.
믿음의 공동체의 본질, 핵심은 ‘복음증거’입니다.
우리 개개인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통해 하나님의 복음이 증거되고 하나님의 생명력이
확산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한 삶의 원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사도행전 8:5-8)
빌립이 복음 증거 할 때 강력한 역사가 나타납니다.
귀신이 떠나가고 병자들이 낳고 치유되는 현상들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복음증거의 역동성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온 우주의 통치자이십니다.
당신의 주권과 당신의 통치를 드러내기 원하십니다.
그것은 ‘복음증거’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가족과 이웃에게 복음 증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를 선포하는
가장 소중한 핵심이라는 것을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디모데후서 4:1-2)
복음증거는 ‘선택’이 아닌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복음증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절대 목적 입니다
구원 얻었으면 전해야 합니다.
구원 얻었다면 ‘구원 시키기’ 위해서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크리스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요구라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루살렘 공동체에 왜 이러한 핍박이 주어졌을까요?
물론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은 결코 복음을 위해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에게만 복음이 증거됐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의식이 여전히 강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력을 파급시키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전 세계에 파급시킨 이유는
바로 그들의 잘못된 ‘선민사상’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나라의 속국이 됐음에도 자신들만 하나님의 백성이라
생각하는 ‘민족 우월주의’에 빠져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전 세계에 흩어버리셨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항상 서로 말씀 앞에 연합하고
성장하면 또 흩어지고 끊임없이 생명을 파급시켜야 합니다.
교회 안의 소그룹의 목적은 흩어짐에 있고 생명력을 파급시키는 게 있습니다.
*핍박자 사울이 복음의 주역이 되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점이 생깁니다.
왜 복음을 위해 신앙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준비된
바나바가 아닌 핍박자인 사울이 세워졌을까요?
바나바는 사울의 옆에서 서포트하는 조력자가 됩니다.
우리는 1인자 에게 항상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지만
하나님은 바나바와 같은 좋은 사람을 통해서 사울을 ’바울 되게‘ 만드십니다,
나중에 보면 바나바가 아니었다면 사울은 위대한 사도로서의
역량을 발휘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을 세우고 사울과 함께 파송하고
사울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파급시키는 조력자로 서게 됩니다.
마치 바나바는 ’성령‘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오셔서 당신을 드러내기보다는
예수를 믿고 고백하게 하시고 성부 하나님을 우리가 고백하도록
도우시는 철저히 ’조력자‘의 역할을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의 사람 같은 사람, 교역하는 사람‘인 바나바의 도움으로
핍박자 사울이 역사의 무대에 섭니다. 이 사람이 복음을 통해서 변화되고
생명의 복음을 파급시키는 위대한 사도로서 세상 속에서
벽을 깨뜨리고 편견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생명을 파급시키는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 갑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경험하게 하는 신비로운 원동력
누군가에게 복음증거 할 때 나타난 위대한 생명력,
가족들에게 복음증거 할 때 나타나는 하나님의 생명력!
우리가 이웃에게 복음 증거할 때 나타나는
하나님의 위대한 생명력! 그것이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며
크리스찬들의 진정한 삶의 동력입니다.
우리는 예배 회복을 기대합니다.
하나님 앞에 함께 감동의 예배를 다시 한번 드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흩어져 있을 때,
예배가 단절되고 이렇게 함께 모이지도 못할 때,
가정에서부터 복음이 증거되고 이웃에게도 복음이 증거되어
하나님의 복음이 확장되는 현장을 함께 공유한다면
언젠가는 지금의 이 모든 고난과 역경들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위대한 반전이 되는 현장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름받은 특권에만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왜 보내셨을까.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다시 한번 점검해서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응답하고
순복하는 바로 그 공동체, 크리스찬으로 세워져 가길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