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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부
작성일
2021-01-31 08:24
조회
1917
1월 30일 1부 ㅡ 5부 현장예배 & 온라인예배
1부 7시 현장예배 ....
2부 9시예배.....
3부 11시예배 ......
광야 교회의 신앙인!'(행7:33~38)
‘구속사’는 죄인인 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모든 구원 계획과
그분이 행한 모든 행동,
즉, 구원의 모든 확증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허물로 죽었던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주시고 그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
부활을 믿지 못하는 우리 안에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로 믿게 하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영생을 선물로 주신 것, 또 구원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험난한 인생 광야를 지나고 있지만 하나님의 통치와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든 삶을 인정하고 선언하는 것을
구속사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스데반집사의 설교에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짧지만 아주 짙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와 모든 청중 앞에서
그는 아브라함을 시작으로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 속에
하나님의 어떤 면밀한 구원계획이 드러나고 있는지,
무엇을 향한 구원계획이었는지 성령님의 도우심을 따라
진리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너무나 소중한 단어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바로, ‘교회’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어로 ‘Qahal’(카할),
헬라어로는 ‘Ekklesia’(에클레시아)라고 말하며
‘불러내서 하나의 회중을 이루게 하셨다’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어 ‘교회’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죄악 가운데서 불러내시고 하나님의 임재 속에
거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교회’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그들을 오로지 약속된 땅, 가나안 복락만을 바라 볼 뿐
‘광야를 제대로 걸어가는 것‘의 중요성을 몰랐습니다.
스데반은 성령의 이끄심으로 산헤드린 공회와
모든 청중 앞에서 증거합니다.
끊임없이 하나님께 불평과 반역을 반복하며
광야 생활에서 불순종했던 이스라엘과 ‛광야’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가치관을 설명하면서 스데반은
자신이 왜 고발당했는지에 대한 이유가 사람들이
진리와 교회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대적했고 심지어 그 예수의 증인 된
자신까지도 대적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깨닫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스데반을
돌로 쳐 순교시키는 장면이 7장 전체에 나타납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의 초점은 ‘지금’에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에만 소망을 두고 산다면
우리의 신앙은 ‘이원론적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스데반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면서 왜 아브라함부터 시작해
모세를 통한 출애굽 사건에 강력하게 초점을 두었는지
그리고 ’광야교회‘라는 새로운 단어를 사용하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데반이 순교 당한 이유는 예수님을 대적했던 산헤드린 공회와
그들을 따르는 무리들 앞에서 복음을 증거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교회에 대해서 바른 진리를 가르치는 스데반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분노하는 그들의 잘못된
가치관과의 ‛충돌’ 때문이었습니다.
스데반을 죽인 산헤드린 공회와 무리들은 자칭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스데반이 전한 ‘교회’에 대한 바른 진리의 말씀은 그들이 꿈꾸는 세상의
영광, 허세가 과연 하나님이 추구하는 진정한 교회의 가치관과 맞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즉, 바른 교회에 대한 가치관은
그들에 대한 ’도전‘이었고, 그것은 그들의 삶과 충돌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것이 스데반이 순교 당한 궁극적인 이유였습니다.
사실 스데반의 교회에 대한 진리의 말씀은 당시 산헤드린 공회와
무리들 에게만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듣고 싶지 않은 말씀일 수 있습니다. 지금 듣고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도 그들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자칫하면 우리의 신앙이 편협해지고 왜곡될 위험이 참 많습니다.
과연 ‛오늘’을 그 통치 앞에서 살아내고 있는지,
하나님의 임재 속에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답할 수 없다면 우
리의 신앙은 ‛반쪽짜리’에 불과합니다
교회 생활은 어떤 공동체 안에 거하는 것 뿐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현장 즉, 광야 인생에서
한걸음 한걸음 내 딛을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끊임없이
확인하고 살아야 하는 것, 이 두 가지가 일치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온전한 신앙일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 하나님의 구속사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축복의 약속을 하십니다.
그것은 단지 땅, 자손만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파급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선언 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거대한 민족으로 성장하기까지
그들의 역사 속에는 하나님의 ‘구속사’와 ‘섭리’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눈물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사‘를 성취해가는
과정으로 선용하십니다. 고센 땅에 정착하게 되고 거대한
민족이 된 이스라엘은 고된 노역에 시달리는 노예의 삶으로
전락하게 되고 바로 이때 모세가 태어납니다.
모세는 태어날 때부터 부모와 계속 함께 할 수 없는 한계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그는 이집트 공주의
아들로 성장하게 되고 나이 40세에 자신이 가진 힘을
이용해 이스라엘을 구원하리라 오판하여 애굽사람을
죽이고 광야로 도망가 40년 동안 유랑생활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손이냐, 나의 손이냐’는 것입니다.
신앙과 우상의 차이는 여기에 있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면 신앙이지만
‘나의 힘, 나의 능력, 내 것’이라는 가치관이 개입되면 될수록
그것은 신앙이 아닌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모세가 80세 노인이 되었을 때 그는 꺼지지 않는 떨기나무 아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너는 나의 손을 의지하고 가서
내 백성을 이끌어 내라’ 이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은 ‘나’에서 ‘하나님’께로 확실하게 방향 전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모세는 ‘하나님이 전부인 성숙한 신앙인’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손’에 의해 파라오는 굴복 당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너고 광야로 들어갑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개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공급자’ 정도가 아니라 이 세상 그 무엇도 하나님 아니면
존재할 수 없는 ‘절대적인 주권자’ 이십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모든 은혜와 사랑을
‘수단’으로 전락시켜버리고 모든 것이 불가능한 ‘광야’라는 현장에서
그들은 마치 자신의 힘으로 사는 냥 왜곡된 삶을 삽니다.
광야는 하나님이 늘 함께하셨던 현장이었고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철저히 외면하고
급기야는 하나님을 그리고 모세마저도 대적합니다.
35 저희 말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을 의탁하여 관
38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사도행전 7:37-38)
38절에 스데반 집사가 사용하는 놀라운 언어가 있습니다.
‘광야교회’. 우리의 삶 자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란 이런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와 돌보심이 가장 강력하고
선명하게 드러났던 현장이 바로 광야였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척박하고 지겨운 땅’에 불과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광야를 이렇게 말합니다.
31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행로 중에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신명기 1:30-31)
광야 생활 그 모든 순간순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걸어온 것입니다. 그 품에 안겨서
그들은 매일 불평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소중한 현장인 ‘광야’를 상실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그 사랑을 고스란히 거부하고 눈에 보이는
현실과 본능적인 감각에 이끌려 행동했던 그들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없었습니다.
*이 일에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신명기 1:32)
분명 ‘광야교회’였지만 그들의 모습은 결코 교회답지 않았다는
‘모세의 선언’이었습니다.
매일 기적을 목도 하며 사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사람이었지만
그들에게는 깨닫는 마음도 보는 눈도, 듣는 귀도 없었습니다.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기억하고
함께하심에 감사하고 그 사랑에 대한 감격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교회의 바른 모습인데 이스라엘 백성은 그저 ‘동물적인 본능’으로만
살았습니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매일 기적을 보고
역사를 경험해도 깨닫는 마음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매 순간을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
듣는 귀에 의해 살아왔는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우리가 말할 때
‘어려운 순간에 기도했다’는 것은 믿음이 될 수 있지만
‘내가 기도했더니 이렇게 복 주셨다’는 고백은 우상이 됩니다.
내가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 아니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공급해주시는 초점을 두는 것은 신앙이 아닌 ‘성공신화’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고백은 같아 보이지만 사실 아주 미묘한 차이로 ‘
신앙과 우상’으로 나뉩니다.
모이는 교회만큼이나 흩어져있는 교회도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믿음이 내가 살아가는 ‘오늘’에 적용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회의 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전 삶을 통해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구한 다윗의 신앙을 잘 압니다. 그는 성전 건축을 갈망 하지만
하나님은 거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을 아시고
‘나를 향한 네 마음이 성전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솔로몬을 통해 성전은 지어지지만 그 곳은 곧 우상화가 되고 맙니다.
성전에 와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다시 삶으로 돌아가서
그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동일하게 살아야 하는데 그저 공급이
필요할 때마다 와서 비는 장소로 전락합니다.
*성전 ㅡ예수의 십자가, 죽으심, 부활을 통해 다시 회복하심
산헤드린 공회는 헤롯이 만든 성전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챙기며
이익을 추구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절대주권,
하나님의 임재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내 집을
도적의 소굴로 만들었다’ 하시며 분노하셨습니다.
예수를 제대로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이익이나 욕구가
아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순복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성전은 건물이 아니며 ‘예수만이 진정한 성전’이라고
전하지만 산헤드린 공회와 그 무리 들은 거부하고 듣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는 세 가지 사건이 한 번에 나타납니다.
첫 번째는 칠십 인을 파송하여 복음 증거하여
하나님의 강한 임재가 드러낸 사건입니다.
사도들은 예수 이름으로 나타난 권능을 경험한 기쁨으로
보고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능력을 행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너희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 즉, 겉으로 드러나는 능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가 더욱더 가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자기 의’에 대해 자만하던 율법사가 찾아오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있었지만 이웃사랑은 결여되어 있는 신앙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리아와 마르다를 통해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 관심의 초점에 따라 상반된 자매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사랑은 그 대상에 모든 관심, 전 마음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0:42)
본문 안에 ‘이 좋은 편’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선한 것,
즉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 말씀을 갈망하고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이고 성경에서 말하는 ‘좋은 편’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맞을 준비로 부산하게 움직였지만
그것은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가, 왜 오셨는가,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순간순간 왜곡될 수 있습니다.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음 전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제자들,
자기 의를 자랑하는 율법사, 그리고 말씀을 갈망하며
들은 마리아. 이 세 부류의 사람들 중에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 듣는 귀’는 누구에게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마리아에게만 있습니다.
그녀의 관심은 오직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보고 깨닫는 것에만 집중됩니다
진정한 신앙의 가치관은 때론 힘든 광야를 걷기도 하고
또 빛 된 삶을 산다해도,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그 은혜 가운데 매일매일 사는 것에 감사하고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사도행전 7:54)
우리의 인생 광야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모습이 과연
교회다운지 끊임없이 확인하고 살아야 합니다.
어느 곳,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이 나를 품에 안아주고 가신다는 것을 ’경험‘하며 살아야 합니다.
신앙은 결코 이원화될 수 없습니다.
공동체가 모인 예배당이나 가정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품에 안겨 매 순간 그분의 전적인 통치와 그분 없이는
안되는 고백 속에서 사는 것을 성경은 ’신앙‘이라 말합니다.
성전에서와 우리의 삶의 태도와 모습이 다르다면
우린 현실에 대해 분노하고 좌절하고 말 것입니다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10:8-10)
이것은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죄악 가운데서 건져내 주셨고
예수의 보배로운 피로 나를 구속하셨습니다.
이 고백이 지금도 여전히 우리 안에서 유효하고 진행되고 있는지,
오늘도 여전히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광야교회’다운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 내 태도와 모습이 달라지지는
않는지 스스로 질문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성찰하고 하나님 앞에서 더욱더
무릎 꿇는 삶, 한 순간도 하나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 삶을 살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그러한 소중한 은혜들이 더욱더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부 9시예배.....
3부 11시예배 ......
광야 교회의 신앙인!'(행7:33~38)
‘구속사’는 죄인인 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모든 구원 계획과
그분이 행한 모든 행동,
즉, 구원의 모든 확증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허물로 죽었던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주시고 그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
부활을 믿지 못하는 우리 안에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로 믿게 하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영생을 선물로 주신 것, 또 구원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험난한 인생 광야를 지나고 있지만 하나님의 통치와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든 삶을 인정하고 선언하는 것을
구속사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스데반집사의 설교에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짧지만 아주 짙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와 모든 청중 앞에서
그는 아브라함을 시작으로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 속에
하나님의 어떤 면밀한 구원계획이 드러나고 있는지,
무엇을 향한 구원계획이었는지 성령님의 도우심을 따라
진리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너무나 소중한 단어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바로, ‘교회’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어로 ‘Qahal’(카할),
헬라어로는 ‘Ekklesia’(에클레시아)라고 말하며
‘불러내서 하나의 회중을 이루게 하셨다’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어 ‘교회’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죄악 가운데서 불러내시고 하나님의 임재 속에
거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교회’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그들을 오로지 약속된 땅, 가나안 복락만을 바라 볼 뿐
‘광야를 제대로 걸어가는 것‘의 중요성을 몰랐습니다.
스데반은 성령의 이끄심으로 산헤드린 공회와
모든 청중 앞에서 증거합니다.
끊임없이 하나님께 불평과 반역을 반복하며
광야 생활에서 불순종했던 이스라엘과 ‛광야’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가치관을 설명하면서 스데반은
자신이 왜 고발당했는지에 대한 이유가 사람들이
진리와 교회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대적했고 심지어 그 예수의 증인 된
자신까지도 대적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깨닫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스데반을
돌로 쳐 순교시키는 장면이 7장 전체에 나타납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의 초점은 ‘지금’에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에만 소망을 두고 산다면
우리의 신앙은 ‘이원론적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스데반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면서 왜 아브라함부터 시작해
모세를 통한 출애굽 사건에 강력하게 초점을 두었는지
그리고 ’광야교회‘라는 새로운 단어를 사용하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데반이 순교 당한 이유는 예수님을 대적했던 산헤드린 공회와
그들을 따르는 무리들 앞에서 복음을 증거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교회에 대해서 바른 진리를 가르치는 스데반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분노하는 그들의 잘못된
가치관과의 ‛충돌’ 때문이었습니다.
스데반을 죽인 산헤드린 공회와 무리들은 자칭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스데반이 전한 ‘교회’에 대한 바른 진리의 말씀은 그들이 꿈꾸는 세상의
영광, 허세가 과연 하나님이 추구하는 진정한 교회의 가치관과 맞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즉, 바른 교회에 대한 가치관은
그들에 대한 ’도전‘이었고, 그것은 그들의 삶과 충돌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것이 스데반이 순교 당한 궁극적인 이유였습니다.
사실 스데반의 교회에 대한 진리의 말씀은 당시 산헤드린 공회와
무리들 에게만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듣고 싶지 않은 말씀일 수 있습니다. 지금 듣고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도 그들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자칫하면 우리의 신앙이 편협해지고 왜곡될 위험이 참 많습니다.
과연 ‛오늘’을 그 통치 앞에서 살아내고 있는지,
하나님의 임재 속에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답할 수 없다면 우
리의 신앙은 ‛반쪽짜리’에 불과합니다
교회 생활은 어떤 공동체 안에 거하는 것 뿐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현장 즉, 광야 인생에서
한걸음 한걸음 내 딛을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끊임없이
확인하고 살아야 하는 것, 이 두 가지가 일치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온전한 신앙일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 하나님의 구속사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축복의 약속을 하십니다.
그것은 단지 땅, 자손만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파급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선언 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거대한 민족으로 성장하기까지
그들의 역사 속에는 하나님의 ‘구속사’와 ‘섭리’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눈물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사‘를 성취해가는
과정으로 선용하십니다. 고센 땅에 정착하게 되고 거대한
민족이 된 이스라엘은 고된 노역에 시달리는 노예의 삶으로
전락하게 되고 바로 이때 모세가 태어납니다.
모세는 태어날 때부터 부모와 계속 함께 할 수 없는 한계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그는 이집트 공주의
아들로 성장하게 되고 나이 40세에 자신이 가진 힘을
이용해 이스라엘을 구원하리라 오판하여 애굽사람을
죽이고 광야로 도망가 40년 동안 유랑생활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손이냐, 나의 손이냐’는 것입니다.
신앙과 우상의 차이는 여기에 있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면 신앙이지만
‘나의 힘, 나의 능력, 내 것’이라는 가치관이 개입되면 될수록
그것은 신앙이 아닌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모세가 80세 노인이 되었을 때 그는 꺼지지 않는 떨기나무 아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너는 나의 손을 의지하고 가서
내 백성을 이끌어 내라’ 이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은 ‘나’에서 ‘하나님’께로 확실하게 방향 전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모세는 ‘하나님이 전부인 성숙한 신앙인’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손’에 의해 파라오는 굴복 당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너고 광야로 들어갑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개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공급자’ 정도가 아니라 이 세상 그 무엇도 하나님 아니면
존재할 수 없는 ‘절대적인 주권자’ 이십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모든 은혜와 사랑을
‘수단’으로 전락시켜버리고 모든 것이 불가능한 ‘광야’라는 현장에서
그들은 마치 자신의 힘으로 사는 냥 왜곡된 삶을 삽니다.
광야는 하나님이 늘 함께하셨던 현장이었고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철저히 외면하고
급기야는 하나님을 그리고 모세마저도 대적합니다.
35 저희 말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을 의탁하여 관
38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사도행전 7:37-38)
38절에 스데반 집사가 사용하는 놀라운 언어가 있습니다.
‘광야교회’. 우리의 삶 자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란 이런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와 돌보심이 가장 강력하고
선명하게 드러났던 현장이 바로 광야였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척박하고 지겨운 땅’에 불과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광야를 이렇게 말합니다.
31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행로 중에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신명기 1:30-31)
광야 생활 그 모든 순간순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걸어온 것입니다. 그 품에 안겨서
그들은 매일 불평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소중한 현장인 ‘광야’를 상실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그 사랑을 고스란히 거부하고 눈에 보이는
현실과 본능적인 감각에 이끌려 행동했던 그들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없었습니다.
*이 일에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신명기 1:32)
분명 ‘광야교회’였지만 그들의 모습은 결코 교회답지 않았다는
‘모세의 선언’이었습니다.
매일 기적을 목도 하며 사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사람이었지만
그들에게는 깨닫는 마음도 보는 눈도, 듣는 귀도 없었습니다.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기억하고
함께하심에 감사하고 그 사랑에 대한 감격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교회의 바른 모습인데 이스라엘 백성은 그저 ‘동물적인 본능’으로만
살았습니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매일 기적을 보고
역사를 경험해도 깨닫는 마음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매 순간을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
듣는 귀에 의해 살아왔는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우리가 말할 때
‘어려운 순간에 기도했다’는 것은 믿음이 될 수 있지만
‘내가 기도했더니 이렇게 복 주셨다’는 고백은 우상이 됩니다.
내가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 아니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공급해주시는 초점을 두는 것은 신앙이 아닌 ‘성공신화’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고백은 같아 보이지만 사실 아주 미묘한 차이로 ‘
신앙과 우상’으로 나뉩니다.
모이는 교회만큼이나 흩어져있는 교회도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믿음이 내가 살아가는 ‘오늘’에 적용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회의 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전 삶을 통해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구한 다윗의 신앙을 잘 압니다. 그는 성전 건축을 갈망 하지만
하나님은 거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을 아시고
‘나를 향한 네 마음이 성전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솔로몬을 통해 성전은 지어지지만 그 곳은 곧 우상화가 되고 맙니다.
성전에 와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다시 삶으로 돌아가서
그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동일하게 살아야 하는데 그저 공급이
필요할 때마다 와서 비는 장소로 전락합니다.
*성전 ㅡ예수의 십자가, 죽으심, 부활을 통해 다시 회복하심
산헤드린 공회는 헤롯이 만든 성전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챙기며
이익을 추구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절대주권,
하나님의 임재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내 집을
도적의 소굴로 만들었다’ 하시며 분노하셨습니다.
예수를 제대로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이익이나 욕구가
아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순복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성전은 건물이 아니며 ‘예수만이 진정한 성전’이라고
전하지만 산헤드린 공회와 그 무리 들은 거부하고 듣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는 세 가지 사건이 한 번에 나타납니다.
첫 번째는 칠십 인을 파송하여 복음 증거하여
하나님의 강한 임재가 드러낸 사건입니다.
사도들은 예수 이름으로 나타난 권능을 경험한 기쁨으로
보고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능력을 행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너희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 즉, 겉으로 드러나는 능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가 더욱더 가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자기 의’에 대해 자만하던 율법사가 찾아오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있었지만 이웃사랑은 결여되어 있는 신앙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리아와 마르다를 통해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 관심의 초점에 따라 상반된 자매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사랑은 그 대상에 모든 관심, 전 마음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0:42)
본문 안에 ‘이 좋은 편’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선한 것,
즉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 말씀을 갈망하고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이고 성경에서 말하는 ‘좋은 편’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맞을 준비로 부산하게 움직였지만
그것은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가, 왜 오셨는가,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순간순간 왜곡될 수 있습니다.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음 전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제자들,
자기 의를 자랑하는 율법사, 그리고 말씀을 갈망하며
들은 마리아. 이 세 부류의 사람들 중에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 듣는 귀’는 누구에게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마리아에게만 있습니다.
그녀의 관심은 오직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보고 깨닫는 것에만 집중됩니다
진정한 신앙의 가치관은 때론 힘든 광야를 걷기도 하고
또 빛 된 삶을 산다해도,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그 은혜 가운데 매일매일 사는 것에 감사하고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사도행전 7:54)
우리의 인생 광야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모습이 과연
교회다운지 끊임없이 확인하고 살아야 합니다.
어느 곳,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이 나를 품에 안아주고 가신다는 것을 ’경험‘하며 살아야 합니다.
신앙은 결코 이원화될 수 없습니다.
공동체가 모인 예배당이나 가정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품에 안겨 매 순간 그분의 전적인 통치와 그분 없이는
안되는 고백 속에서 사는 것을 성경은 ’신앙‘이라 말합니다.
성전에서와 우리의 삶의 태도와 모습이 다르다면
우린 현실에 대해 분노하고 좌절하고 말 것입니다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10:8-10)
이것은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죄악 가운데서 건져내 주셨고
예수의 보배로운 피로 나를 구속하셨습니다.
이 고백이 지금도 여전히 우리 안에서 유효하고 진행되고 있는지,
오늘도 여전히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광야교회’다운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 내 태도와 모습이 달라지지는
않는지 스스로 질문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성찰하고 하나님 앞에서 더욱더
무릎 꿇는 삶, 한 순간도 하나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 삶을 살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그러한 소중한 은혜들이 더욱더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