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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부
작성일
2020-11-08 10:11
조회
1463
11월8일 주일 2부, 3부 ㅡ친밀하신 하나님!' (왕상19:4~13)
9시 2부 예배...
11시 3부 예배....
친밀하신 하나님!' (왕상19:4~13)
과거에 스캇 펙이라는 유명한 작가가 말하길
크리스찬의 오만함은 신을 독점해서 마치 자신의 포켓 속에 하나님을 넣어두고
자기의 어떤 개념이 내게 유익을 주거나 인생의 플러스가 될 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믿는데
내 인생의 어려움이 찾아오거나 곤비함이 찾아오면
하나님이 나를 떠났다 혹은 버렸다 라고
생각한다는 논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제적으로 우리가 터널을 지날 때 고통을 겪을 때
거기에 임재해 계심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캄캄한 밤에 하늘에 별이 더 찬란하게 빛나는 것처럼...
엘리야가 찬란한 역사의 현장 앞에...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드러났지만
그 자신은 하나님의 깊은 임재를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불로 응답받고 아합의 병거 앞에 뛰어갔던 그 뜨거운 감동은 사라진채
번아웃 되어 지금 죽기를 구하는 현실입니다
많은 사람이 승리를 자랑하지만 화려함, 영광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가면 하나님을 높였던 영광이 자기를 향해서
왜곡된 가치관으로 자기 자신의 자랑, 공로가 됩니다
하나님이 하셨다 고백하지만 은근히 자신의 오만함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습니다
신앙의 연조가 좋은데 위험한 것은 그 신앙의 연조속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는데
갈수록 남는 것은 교만, 자랑, 공로만 남게 된다면
그 많은 신앙의 기간동안 농축된 깊은 영성이 존재해야 하는데
갈수록 가벼움만 남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갈수록 농익은 신앙, 하나님의 은혜, 사랑이 필요합니다
엘리야에게서 우리가 그런 모습을 찾지 못합니다.
3년 6개월 동안 연단받고 무릎꿇고 살때는 깊은 영성이 있었고
말씀이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는 그런 신앙인이었는데
그가 그 강력한 역사를 경험하고 난 후 하루아침에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 도우심이 아닌
나, 나, 나 내가 남고 공로 경험만 남은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 과거의 명성은 다 어디로 갔는가?
*명성보다 중요한 것은 영성
경력보다 중요한 것은 여전히 신실한 신뢰를 선언하는 영성입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는 흙으로 빚어 만든 질그릇 같은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은혜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오늘도 여전히 깨지고 상처 입고 사라지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세상 것으로 우리를 포장해서 그것이 나인 것으로 착각합니다
목사의 가장 소중한 영성도 내가 아무것도 아닐 때 드러납니다.
아무도 없는 상황 속에서 무릎꿇을 때 그때 그 사람이 드러납니다
내면이 가장 중요합니다
혼자 있을 때 나는 어떤 모습일까?
바울의 진정한 면모는 하나님의 은혜아니면 나는 죄인의 괴수라 고백한 것입니다.
내가 약할 할 온전하여 짐이라
은혜 아니면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왜 엘리야가 번아웃됩니까?
이 사람이 계속 승승장구했다면 오만함으로 몰락할 수 있었기에...
3년 6개월 동안 닫혔던 하늘의 문을 열었던 것은 엘리야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에...
공로의식 자만으로 한 때의 성공의 과시 이런것들이
그가 몰락하고 주저앉게 했습니다.
*그때 그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습니다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손길
*왕상19:5-7
로뎀 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본문에서 말씀하는 천사는
육체를 입으신 예수님의 어루만지심이었을 것입니다.
어루만지시고 터치하신 하나님...
왜 그러셨을까 ?
모리슨 이라는 심리학자가 쓴 털 없는 원숭이라는 책에 보면
인간이 터치를 통해 얼마나 많은 위로를 받는가 얘기합니다.
인간은 본래 부드러움에 대한 원함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부드러움과 터치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많이 안아주는 것이 인격 형성에 도움이 됩니다
부부 사이에도 많은 터치가 필요합니다.
영혼도 육체도 터치해주어야 합니다.
엘리야를 주님께서 어루만지십니다.
우리가 예배를 어떤 종교적인 행위로 이해합니다
예배는 우리 영혼과 삶을 보듬는 현장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배는 종교의식이 아닙니다
형식만 남고 가슴이 없다면...예배는 전 인격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왜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나요 ?
우리의 전 인격을 보듬는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을
경험하는 현장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멀리 계신 하나님 두려움의 하나님이 아닌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그 분 앞에 순종하면 하나님은 친밀하신 분이 됩니다
내가 태양을 향해 서면 빛은 내 앞에 섭니다.
내가 태양을 등지는 순간 그림자가 찾아옵니다
복종은 권위자에 대한 태도다
순종은 고분고분하게 따르는 것이다.
우리가 순종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친밀함으로 다가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회복!
*엘리야--지치고 절망한 그에게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
*왜 여기있느냐?
*절망과 낙심의 현장에서 용기를 주시는 말씀
*하나님의 사람 다윗!
백성이 각기 자녀들을 위하여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군급 하였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사무엘상30:6)
믿었던 동지들에게 배신의 고통을 겪는 다윗
그런데 성경은 놀라운 말씀을 합니다.
사람에게는 해법이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방향을 돌이키고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용기를 얻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함께 하신 하나님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세 번씩 주님을 부인하고 그의 삶이 몰락합니다
절망으로 가득찬 그를 찾아오셔서 그를 향해서 빵과 물고기를 구워주시며
‘네가 나를 사랑 하느냐’ 세 번 물으십니다
이유는 그가 세 번 부인했던 것을 면제시켜 주는 선언이었습니다.
책망이 운명을 바꾸지 못합니다
한마디 격려가 운명을 바꿉니다.
*요21장--베드로를 회복시켜 주시는 주님의 음성
*행9장--핍박자 사울을 변화시키는 주님의 음성
사울이 믿는자를 핍박할 때 빛으로 인해 앞을 보지 못하게되고
그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음성이 들려올 때 그가 변화됩니다.
지금 들어야 합니다.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지금은 성령이 이 말씀을 통해서 내게 임재하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가장 소중한 현장은 객관적으로 말씀 앞에 철저하게 순복하는 현장입니다
오늘 못 들으면 우리 인생은 어려워집니다.
하나님께서 목사를 통해 어떤 따뜻한 당신의 마음을 전하려 하는가
예배는 찬양할 때 기도할 때 은혜도 누리지만
말씀을 들을 때 내게 임재 하시는 하나님의 귀한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히1:1-2--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시대 시대마다 임하셨던 주님의 말씀
때로 예언자들을 통해서...
지금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하고 계십니다.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듣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명료하게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말씀 앞에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2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소집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너희 목전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행하신 모든 일을 너희가 보았나니
3 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가 목도 하였느니라.
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신명기29:2-4)
*깨닫는 마음=보는 눈=듣는 귀 같은 맹락 입니다.
깨달으면 보고 들은 사람입니다.
오늘 이 시간도 깨닫고 보고 듣지 못하면 예배가 허상이 됩니다.
이 세 가지 단어는 같은 것입니다
가장 큰 복은 순종입니다
깨닫는 마음과 보는 마음 듣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전심으로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고 경험하라!
*성경적 사고로! 나아가야 합니다.
*로마로 압송당하던 바울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셨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27:24-25)
여러분! 바울이 요나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정반대로 갔나요?
사도바울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고 있었음에도
엄청난 풍랑이 와서 다 죽게 됩니다
그때 바울은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어딨는지 질문합니다.
너 하나 때문에 이들이 살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위대한 반전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보는 눈 , 듣는 귀,. 깨닫는 마음이 함께 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총체적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으며 어떻게 반응하는가 !
이것을 바라보는 것이 신앙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엘리야의 약함을 통해 주시는 또 다른 하나님의 약속
그를 통해 다음 세대가 세워지고
그를 통해 하나님이 행하신 능력이드러납니다.
*말
잠18:21--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그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지금 엘리야가 왜 위험한가요?
불 신앙적인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그 사람의 신앙이 되기도 하기에,...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열왕기상19:4)
위기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송축했던 말을 다 어디로 가고...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사람의 언어가 있어야 합니다
깨닫고 , 보고, 들은 사람은 그 결과대로
현실을 현실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재해석 해야 합니다.
나를 통해 어떤 일을 행하실까?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말씀만 주십니다.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긴다.
너는 내 존귀한 자녀다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언어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결론입니다.
왜 우리에게 두려움이 생기나요 ?
*말에는 권세가 있다
*두려움
시선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을 바라봄이 확고해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두려움이 사라진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왕상19:12-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오늘 내게는 어떤 음성이 들려옵니까
오늘 예배를 드리고 나가며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보고 들었는가 !!
아쉽게도 많은 사람이 예배에 참여하지만
진정한 예배자로 서지 못하고 여전히 낙심 속에 사는 이유는
제대로 듣고 보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홍해가 갈라진 것을 보고도, 불이 떨어진 것을 보고도
제대로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여전히 오늘 들려오는 음성 앞에
제대로 설 때 우리는 용기 있게 나를 과시하지 않고 자만하지 않고
한걸음 한걸음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을 믿음이라 말씀 합니다.
오늘 우리 안에 그런 위대한 승리의 역사 들이 가득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1시 3부 예배....
친밀하신 하나님!' (왕상19:4~13)
과거에 스캇 펙이라는 유명한 작가가 말하길
크리스찬의 오만함은 신을 독점해서 마치 자신의 포켓 속에 하나님을 넣어두고
자기의 어떤 개념이 내게 유익을 주거나 인생의 플러스가 될 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믿는데
내 인생의 어려움이 찾아오거나 곤비함이 찾아오면
하나님이 나를 떠났다 혹은 버렸다 라고
생각한다는 논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제적으로 우리가 터널을 지날 때 고통을 겪을 때
거기에 임재해 계심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캄캄한 밤에 하늘에 별이 더 찬란하게 빛나는 것처럼...
엘리야가 찬란한 역사의 현장 앞에...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드러났지만
그 자신은 하나님의 깊은 임재를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불로 응답받고 아합의 병거 앞에 뛰어갔던 그 뜨거운 감동은 사라진채
번아웃 되어 지금 죽기를 구하는 현실입니다
많은 사람이 승리를 자랑하지만 화려함, 영광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가면 하나님을 높였던 영광이 자기를 향해서
왜곡된 가치관으로 자기 자신의 자랑, 공로가 됩니다
하나님이 하셨다 고백하지만 은근히 자신의 오만함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습니다
신앙의 연조가 좋은데 위험한 것은 그 신앙의 연조속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는데
갈수록 남는 것은 교만, 자랑, 공로만 남게 된다면
그 많은 신앙의 기간동안 농축된 깊은 영성이 존재해야 하는데
갈수록 가벼움만 남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갈수록 농익은 신앙, 하나님의 은혜, 사랑이 필요합니다
엘리야에게서 우리가 그런 모습을 찾지 못합니다.
3년 6개월 동안 연단받고 무릎꿇고 살때는 깊은 영성이 있었고
말씀이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는 그런 신앙인이었는데
그가 그 강력한 역사를 경험하고 난 후 하루아침에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 도우심이 아닌
나, 나, 나 내가 남고 공로 경험만 남은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 과거의 명성은 다 어디로 갔는가?
*명성보다 중요한 것은 영성
경력보다 중요한 것은 여전히 신실한 신뢰를 선언하는 영성입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는 흙으로 빚어 만든 질그릇 같은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은혜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오늘도 여전히 깨지고 상처 입고 사라지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세상 것으로 우리를 포장해서 그것이 나인 것으로 착각합니다
목사의 가장 소중한 영성도 내가 아무것도 아닐 때 드러납니다.
아무도 없는 상황 속에서 무릎꿇을 때 그때 그 사람이 드러납니다
내면이 가장 중요합니다
혼자 있을 때 나는 어떤 모습일까?
바울의 진정한 면모는 하나님의 은혜아니면 나는 죄인의 괴수라 고백한 것입니다.
내가 약할 할 온전하여 짐이라
은혜 아니면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왜 엘리야가 번아웃됩니까?
이 사람이 계속 승승장구했다면 오만함으로 몰락할 수 있었기에...
3년 6개월 동안 닫혔던 하늘의 문을 열었던 것은 엘리야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에...
공로의식 자만으로 한 때의 성공의 과시 이런것들이
그가 몰락하고 주저앉게 했습니다.
*그때 그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습니다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손길
*왕상19:5-7
로뎀 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본문에서 말씀하는 천사는
육체를 입으신 예수님의 어루만지심이었을 것입니다.
어루만지시고 터치하신 하나님...
왜 그러셨을까 ?
모리슨 이라는 심리학자가 쓴 털 없는 원숭이라는 책에 보면
인간이 터치를 통해 얼마나 많은 위로를 받는가 얘기합니다.
인간은 본래 부드러움에 대한 원함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부드러움과 터치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많이 안아주는 것이 인격 형성에 도움이 됩니다
부부 사이에도 많은 터치가 필요합니다.
영혼도 육체도 터치해주어야 합니다.
엘리야를 주님께서 어루만지십니다.
우리가 예배를 어떤 종교적인 행위로 이해합니다
예배는 우리 영혼과 삶을 보듬는 현장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배는 종교의식이 아닙니다
형식만 남고 가슴이 없다면...예배는 전 인격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왜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나요 ?
우리의 전 인격을 보듬는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을
경험하는 현장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멀리 계신 하나님 두려움의 하나님이 아닌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그 분 앞에 순종하면 하나님은 친밀하신 분이 됩니다
내가 태양을 향해 서면 빛은 내 앞에 섭니다.
내가 태양을 등지는 순간 그림자가 찾아옵니다
복종은 권위자에 대한 태도다
순종은 고분고분하게 따르는 것이다.
우리가 순종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친밀함으로 다가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회복!
*엘리야--지치고 절망한 그에게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
*왜 여기있느냐?
*절망과 낙심의 현장에서 용기를 주시는 말씀
*하나님의 사람 다윗!
백성이 각기 자녀들을 위하여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군급 하였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사무엘상30:6)
믿었던 동지들에게 배신의 고통을 겪는 다윗
그런데 성경은 놀라운 말씀을 합니다.
사람에게는 해법이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방향을 돌이키고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용기를 얻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함께 하신 하나님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세 번씩 주님을 부인하고 그의 삶이 몰락합니다
절망으로 가득찬 그를 찾아오셔서 그를 향해서 빵과 물고기를 구워주시며
‘네가 나를 사랑 하느냐’ 세 번 물으십니다
이유는 그가 세 번 부인했던 것을 면제시켜 주는 선언이었습니다.
책망이 운명을 바꾸지 못합니다
한마디 격려가 운명을 바꿉니다.
*요21장--베드로를 회복시켜 주시는 주님의 음성
*행9장--핍박자 사울을 변화시키는 주님의 음성
사울이 믿는자를 핍박할 때 빛으로 인해 앞을 보지 못하게되고
그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음성이 들려올 때 그가 변화됩니다.
지금 들어야 합니다.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지금은 성령이 이 말씀을 통해서 내게 임재하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가장 소중한 현장은 객관적으로 말씀 앞에 철저하게 순복하는 현장입니다
오늘 못 들으면 우리 인생은 어려워집니다.
하나님께서 목사를 통해 어떤 따뜻한 당신의 마음을 전하려 하는가
예배는 찬양할 때 기도할 때 은혜도 누리지만
말씀을 들을 때 내게 임재 하시는 하나님의 귀한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히1:1-2--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시대 시대마다 임하셨던 주님의 말씀
때로 예언자들을 통해서...
지금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하고 계십니다.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듣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명료하게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말씀 앞에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2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소집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너희 목전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행하신 모든 일을 너희가 보았나니
3 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가 목도 하였느니라.
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신명기29:2-4)
*깨닫는 마음=보는 눈=듣는 귀 같은 맹락 입니다.
깨달으면 보고 들은 사람입니다.
오늘 이 시간도 깨닫고 보고 듣지 못하면 예배가 허상이 됩니다.
이 세 가지 단어는 같은 것입니다
가장 큰 복은 순종입니다
깨닫는 마음과 보는 마음 듣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전심으로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고 경험하라!
*성경적 사고로! 나아가야 합니다.
*로마로 압송당하던 바울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셨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27:24-25)
여러분! 바울이 요나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정반대로 갔나요?
사도바울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고 있었음에도
엄청난 풍랑이 와서 다 죽게 됩니다
그때 바울은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어딨는지 질문합니다.
너 하나 때문에 이들이 살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위대한 반전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보는 눈 , 듣는 귀,. 깨닫는 마음이 함께 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총체적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으며 어떻게 반응하는가 !
이것을 바라보는 것이 신앙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엘리야의 약함을 통해 주시는 또 다른 하나님의 약속
그를 통해 다음 세대가 세워지고
그를 통해 하나님이 행하신 능력이드러납니다.
*말
잠18:21--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그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지금 엘리야가 왜 위험한가요?
불 신앙적인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그 사람의 신앙이 되기도 하기에,...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열왕기상19:4)
위기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송축했던 말을 다 어디로 가고...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사람의 언어가 있어야 합니다
깨닫고 , 보고, 들은 사람은 그 결과대로
현실을 현실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재해석 해야 합니다.
나를 통해 어떤 일을 행하실까?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말씀만 주십니다.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긴다.
너는 내 존귀한 자녀다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언어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결론입니다.
왜 우리에게 두려움이 생기나요 ?
*말에는 권세가 있다
*두려움
시선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을 바라봄이 확고해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두려움이 사라진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왕상19:12-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오늘 내게는 어떤 음성이 들려옵니까
오늘 예배를 드리고 나가며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보고 들었는가 !!
아쉽게도 많은 사람이 예배에 참여하지만
진정한 예배자로 서지 못하고 여전히 낙심 속에 사는 이유는
제대로 듣고 보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홍해가 갈라진 것을 보고도, 불이 떨어진 것을 보고도
제대로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여전히 오늘 들려오는 음성 앞에
제대로 설 때 우리는 용기 있게 나를 과시하지 않고 자만하지 않고
한걸음 한걸음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을 믿음이라 말씀 합니다.
오늘 우리 안에 그런 위대한 승리의 역사 들이 가득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