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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부
작성일
2018-01-07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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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9
새해 첫주 -2부, 3부, 5부(청년부)예배....
회복의 예배! (느헤미야 8: 8~10)
지난 특새기간동안 한 사람의 영향력에 대한 부분을 같이 마음에 담았습니다.
유대민족이 기원전 586년에 바벨론의 포로가 되고 60년 만에 1차 귀환을 합니다.
제국의 역사가 바뀌어서 페르시아의 고레스 황제가 권력을 잡을 때
1차, 2차에 걸쳐서 포로귀환이 이루어지지만, 국가는 재정비가 되지 않았는데
그중에 하나가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주변에 있는 다른 나라들로부터 여전히 침략을 받는 고통스러운 현장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아닥사스다 왕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그 왕궁에 있었습니다.
느헤미야. 이 사람이 자기 형제로부터 예루살렘의 가슴 아픈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방인들이 쳐들어와서 그들의 모든 삶을 억압한다.”
이 비탄한 소식을 물론 거기에 있던 많은 유대인도 듣고 있었습니다만,
유독 느헤미야 마음속에 연민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내 동족이 이런 고통을 당하는 구나.” “그들이 이런 아픔을 겪는 구나.”
누구보다도 연민이 많으면 사명자일 수 있습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들어도 누구는 연민이 생기고, 누구는 스쳐지나가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따듯하게 만드는 방식이 듣고 연민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마음속에 그 연민이 작은 불꽃으로 지펴집니다.
“하나님 제 동족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금식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이 그를 아닥사스다의 최측근으로 등극하게 하셨습니다.
그의 성공은 자기만의 득세를 위한 현장이
아니었던 것이 동족을 향한 거룩한 바람이 그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사명자는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의식을 갖기 시작합니다.
느헤미야가 기도하면서 “아닥사스다에게 언제 내가 부탁을 할까?”
수심이 가득한 느헤미야에게
왕이 묻습니다! “느헤미야야 네가 왜 수색이 가득하냐?” 할 때
“제 고향 산천이 유린당하고 제 형제자매가 유린당하는데
제가 어떻게 평안할 수 있겠습니까?”하며 자기가 겪고 있는 마음의 마음을 토로합니다.
그때에 왕이 말합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저를 보내주십시오.”
“총독으로 보내주시면 제 동족들을 어루만지고 그들을 견고케하고 나서
돌아오겠습니다.” 왕후까지도 이것을 기뻐해서 그를 보내주기로 작정합니다.
그때에 조서와 더불어서 이 성을 재건할 수 있는
모든 재료까지도 함께 공급해주시길 요청합니다.
하나님의 강한 손이 도우셔서 아닥사스다의 모든 마음을 어루만지셔서
이 모든 것이 허락이 되고. 그는 단숨에 3000km를 달려가서
사흘 동안 주도면밀하게 그 성이 얼마나 황폐화되었는가를 살핀 후
리더쉽을 가진 대제사장들과 동역자들을 모아서 비전을 전이시킵니다.
그들의 총독 산발랏과 도비야 이런 총독들이 은근히 그들을 뒤에서 선동할 때,
우리가 성벽을 재건해서 그들의 침략을 막자. 해서 결국은 리더쉽을 가진 사람들을
독려합니다. 한 손에는 망치를 들고 한 손에는
검을 들고 그들이 밤낮으로 연이어서 이 공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52일 만에 모든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그들이 안전하고 자신들을 방어할만한 방어막이 생겼을 때에
느헤미야는 백성의 수를 세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과연 얼마만큼의 백성이 있는가?
그래서 성을 통해 자기를 방비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군대의 수를 세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가지를 다 준비하죠. 헤아려보고 난 다음에 느헤미야는 이제 자기들을
스스로 보호할만한 힘을 갖춘 이후, 수문 앞 광장에 백성들을 모으라 명령합니다.
“수문 앞 광장에 모이자.”
오늘 본문에 보면, 수문 앞 광장에 모여서 드디어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장면이
드러납니다. 거의 70년 넘게 길게는 한 세기 넘게 예루살렘은 단절되고
그들은 이방으로 끌려간 그런 처참한 백성들이었습니다.
이제는 드디어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보호막을 만들어 놓고,
마음껏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그런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들은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 감격적인 현장을 우리 앞에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해를 시작하면서 물론 다양한 일들이 있겠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내 인생의 견고한 산성으로 의지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겠습니다하는 그 예배는 얼마나 소중한가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바로 수문 앞 광장에서 유대민족이 모여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거기에 임재하시고 당신의 은총을 베푸신 것처럼,
또 하나님이 그들의 힘과 능력이 되신 것처럼 올 한 해 동안에 하나님의 힘과 능력으로
견고하게 여러분의 삶 속에 자리잡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성회가 개최되는 현장이 본문에 드러납니다. (느헤미야 8장 1절~2절)
느헤미야와 에스라의 관계가 본문에 등장하죠. 느헤미야는 정치가였습니다.
페르시아에서 왕의 최측근까지 올라갔던 힘 있는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힘을 자신을 위해 남용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의 물꼬를 트는데 사용하죠.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민족을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선용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느헤미야는 자기 동족을 향한 선한 마음을 갖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이르시게 하신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니겠는가.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누군가를 세우실 때는 하나님의 역사에서
그 사람을 사용하기 위해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위치에서 하나님께 순종치 않으면,
그 자리에 서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려요.
에스더의 삶을 우리가 압니다.
변방의 한 유대인 처녀가 하루아침에 페르시아
대제국의 왕비가 됩니다. 전 세계 각도에서 후보생들을 모았는데
그때 기록에 의하면 2000~3000명의 후보생들이 모였습니다.
에스더가 선출된 이유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당신의 백성을 굽어 살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에스더가 착각하면 안 되죠.
모르드개가 정확하게 지적합니다. “당신이 왕후로 있음이 이때를 위함이 아니겠느뇨?”
“당신이 이 일을 감당치 않으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통해 일을 하시겠거니와
당신과 당신의 집은 망할 것이요.” 아무런 존재 가치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 받지 못하는 것만큼 불쌍한 게 없어요.
높이 올라가도, 내가 세상을 다 장악했어도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신다는 것은
기가 막힌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역사의 모든 흥망성쇠를
하나님이 주관하세요. 모든 제국들을 세우고 제국들을 멸하십니다.
우리가 너무나 많은 이름을 알잖아요. 무대에 섰지만 사라지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름도 없는 누군가를 세우셔서 당신의 거룩한 역사의 주인공으로 세우는
현장을 지금도 바라고 계십니다.
느헤미야가 이 일을 감당합니다.
느헤미야의 강점이 무엇인지를 아십니까? 자신이 감당할 것은 감당하지만,
조력할 것은 조력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정치가입니다.
그 힘을 다 선용해서 유대 민족을 든든히 세우는 성을 쌓고 백성을 규합하지만 말씀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회복하는 것은 자기의 소관이 아닙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에스라를 세워서 함께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누가 강하냐가 아니라 말씀 앞에 함께 공존하는 현장입니다.
학사 에스라는 아주 중요한 인물입니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학사 에스라는
모든 구약 성경의 말씀을 암송했던 사람입니다. 머리 속에 성경이 있어요.
그래서 이 사람이 돌아와서는 모든 불타버린 성경들, 하나하나 모으기도 하지만,
그 성경을 다 자신이 낱낱이 기록해서 성경을 완성했던 인물이 또 에스라입니다.
탁월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위대한 부흥사로서 수문 앞 광장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 하나 낭독하면서 이 말씀을 들려주는 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자 그들이 바벨론에게 무너졌습니다.
전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공유하는 대 성회가 오늘 본문에 드러납니다.
“학사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저희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느헤미야 8장 5절-
여호와의 말씀을 이렇게 펼칩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다 일어서요.
여러분 과거에 어느 때에 이런 적이 있었습니까? 말씀은 도외시 되었고
말씀은 철저하게 잊혀 졌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에스라가 성경을 펼칠 때 백성들이 다 일어서요.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그들 속에 있었던 거죠.
전 백성이 말씀 앞에 일어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듣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 마음으로 사모 합니다”는 그들의 표현이
이런 행동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느헤미야 8장 6절)
에스라가 성경을 펼치고 “하나님 영광 받으소서” 할 때 백성이 “아멘, 아멘.”
그 앞에 무릎 꿇고 엎드려 조아리며 그 높으신 하나님께 전인격으로
경배하는 모습입니다. 이것을 아바드, 엎드려 경배한다. 예배의 구약적인 표현입니다.
전 마음으로 하나님을 높이고 무릎 꿇는 것입니다. 말씀이 펼쳐졌을 뿐인데,
그래도 그렇게 행동합니다. 여러분 몇 백년 사이에 이런 적이 없었습니다.
포로 생활이 물론 좋은 일이 아니죠. 행복할 수도 없고 그것은 복된 일도 아니죠.
분명히 재앙이었고 징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냥 세월만 죽인 것은 아니었어요.
이것이 인생만 힘들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선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 하나님을 의지함,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전적인 순복입니다.
“아멘!” “아멘!” 동의합니다.” “순종 하겠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철저히 순복합니다”라는
전인격을 담은 의지의 고백이 아멘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 능력, 내 의지 다 버리고 하나님께 손들고 돌아옵니다. “
하나님만을 철저하게 의지하고 순복합니다 하는 선언입니다.
여러분 이런 청중이 있다면 그 예배는 생명이 역사하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이만큼 경외하고 하나님 말씀을 이만큼 사모하고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하는
현장이라면, 정말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기뻐하시는 현장이 되겠죠.
그들은 목이 곧았었어요. 철저하게 패역했어요. 그런데 지금 그들은 너무 겸비하고
너무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갈망하는 모습으로 변화되어있습니다.
고난이 선용되었어요. 상처는 별이 된 것이고 인생의 모든 고난은 진주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해까지 우리가 상처가 있었고 아픔이 있었다면,
그것이 선용되어서 이 시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시간으로 채워지길 원합니다.
그럴 때 인생은 새로운 역전의 현장이 있어요. 반전의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느헤미야 8장 8절)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 전달이 됩니다. 말씀에 대한 그들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참 완악 했구나”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느헤미야 8장 9절)
그들이 다 웁니다. 일부가 아니라 전부가 웁니다. 그들이 회개합니다.
그때 느헤미야와 에스라가 이릅니다.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이것은 단순히 울음을 그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충분히 아신다는 고백입니다.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는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거룩한 날, 이제는 기뻐하라!” (느헤미야 8장 10절)
우리의 사는 능력이 어디에 있나요? 하나님의 용서하심, 위로하심에 있습니다.
범죄한 사람은 약해지지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힘을 얻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 힘이다.” 하나님의 언약이죠.
그들이 초막절까지 지킵니다. (느헤미야 8장 15절)
초막절은 가을에 지키는 것인데 미리 지킵니다. 초막절은 광야 생활을 의미합니다.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끄셨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있는데
초막절을 지키는 이유는 과거는 지나갔고 지금 새로운 마음으로 광야를 통과하는 것입니다.
고난의 광야를 통과해서 하나님의 언약인 가나안 땅에 지금 들어오는 것입니다.
과거 그들의 열조가 행했던 모든 것은 끝났고 이제는 나의 광야 생활과 나의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이 지금 실현되는 것입니다. 이제 과거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임재 속에, 하나님의 회복 속에 오늘 서는 현장을 이야기합니다.
과거는 지나갔고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과거를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이 관심 갖는 것은 오늘 그리고 미래를 바라보세요.
희망이 없는 백성은 과거에 고착된 삶을 살지만
우리는 오늘과 미래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예배가 되고 매 순간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그 즐거워함이 나의 힘이 되고 인생의 새로운 회복이 될 수 있는 소중한 역사들이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는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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