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기자부
작성일
2021-02-07 09:41
조회
1866
2월7일 (2부 ㅡ 5부 현장예배 & 온라인예배 )
2부 9시 현장예배 & 온라인예배
말씀이 끝나고 목사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세상속으로 나가야 합니다.
직장과 가정과 삶속에서 하나님의 영향력을 드러내야 합니다.
세상속으로 파송하는 의미로
교회 문 쪽을 향하여 돌아서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3부 11시예배 ....
부름 받은 특권뿐만 아니라
보냄 받은 사명 앞에 응답합시다.
내가 누구인가 정체성을 드러냅시다.
누구와 함께 하는지 어떤 삶을 사는지 !!
보냄 받은 교회의 삶을 살아 내는가 !!
오늘 예배가 끝나고 나가면
삶의 현장에서의 영적 예배가 시작됩니다.
다른 스타일의 예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세상속으로 직장으로 가정으로
보냄 받은 교회의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 교회다운 삶의 모습으로
승리하는 한 주가 됩시다.
'광야 교회의 신앙인!(II)'(행7:33~38)
교회는 하나님 가슴에서 출발한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창1장을 보면 최초의 교회의 모습인 에덴동산이 등장합니다.
하나님 아니면 안 되는 곳,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공급받고
하나님과 더불어 연합했던 그 현장이 바로 에덴동산이었고
그것이 교회의 롤모델 이었습니다.
인간에게 죄가 들어온 후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어 세상에 퍼져
자기들의 우상을 만들어 섬기며 하나님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은 세상 속에서 당신의 백성을 부르십니다.
창세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에녹, 노아, 아브라함을 시작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하게 하시고 광야로 이끌어 내시기까지
하나님의 부르심은 점점 거대해지고 확장되어 갑니다.
스데반 집사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광야 길을 걷는
그 모든 여정이 ‘광야교회’의 모습이라는 것을 설교를 통해서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교회’라는 이 말은 ‘불러내다’라는 뜻으로 히브리어로
‘Qahal’(카할), 헬라어로는 ‘Ekklesia’(에클레시아)이며
즉, ‘불러내어 하나의 거룩한 회중을 이루게 하셨다’라는
의미로 ‘교회’라는 뜻을 갖습니다.
매일매일 똑같고 고달픈 광야였지만
그 현장은 바로 ‘교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 생활로부터
하나님께로부터 부름 받았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우리의 죄와 연관 시켜서 설명을 합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이 말씀은 ‘구원했다’는 것입니다.
무려 430년 노예생활하던 이집트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구속하신 것이 ‘광야’였습니다.
그 출애굽의 현장에는 ‘유월절’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혈통이나 민족성이
아닌 ‘어린양의 피’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 됐다는 선언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출애굽기 19:1-6)
‘내가 너를 구속하였다. 너는 이제 내 백성이 되었다.
그러므로 너희가 제사장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염원이었습니다.
교회는 두 가지 입니다. ‘부름 받은 특권’이 있고
‘보냄 받은 소명’이 있습니다.
세상으로 보내시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네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내게 성령 주셔서 우리 맘을 감동케 하시고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
부활이 나를 위한 것임을 믿게 하시고 살아계신 성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하신 이 모든 것이 ‘은혜’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얻는 믿음에 있어서 인간은 철저하게 수동적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내가 거룩한 반응과 응답의 삶을 살도록
역사하실 것입니다.
‘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데살로니가전서 1:4-5)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은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진정한 성령의 능력은 우리 안에 오셔서 확신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오직 은혜입니다. 나의 모든 헌신과 열심도, 나름대로 세운
어떤 공로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오직 은혜만이 우리 신앙의 기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의 신분
‘은혜’는 신앙의 기본이며 우리는 여기서 더 성숙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 믿는 ‘우리의 신분’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는 ‘성도’,
또 하나는 ‘신실한 자’입니다.
*1. 성도
1) 구별된 자 똑같은 무리 속에서 나를 부르심
‘성도’란 개념 속에는 ‘구별되었다’라는 의미가 포함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별하시고 부르셨습니다. ‘넌 내 백성이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당신의 백성으로 나를 구별하셨습니다.
세상의 수 많은 사람들 중에 왜 나를 구별하셨을까요?
은혜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사신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우리는 ‘성전’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청결케 하시고 당신의 성전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여전히 세상의 가치관으로 가득한 우리 마음에,
우리 인격 속에 찾아오셔서 성령의 전으로 삼으셨습니다.
그 성령이 우리 안에 내재하신 이유는 바로 ‘은혜’ 아니면
설명할 수 없습니다. 또 그 증거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주로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비록 믿지 않는 사람들과 보기에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이것이 내가 구별되었고 성전 되었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2)거룩함을 입은 자
거룩은 어떤 경건한 모양으로 단순히 ‘살아가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 내가 ‘구분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살아가다가도
매 순간 ‘아! 하나님이 나를 구분하셨지’ 하며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 편에 속해 있는 자답게 사는 것을
‘거룩’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원래 거룩하지 않았습니다.
세상과 죄와 연합하며 살았던 우리를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으로
구별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분의 자녀답게 살려는 거룩한 시도를
끊임없이 선언해야 하며 그것이 ‘거룩성’입니다.
단순히 성경을 가까이 두고 살아가는것이 아닌
우리 자신의 ‘의식적인 선언’이 필요합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한 ‘원리’입니다.
*2. 신실한 자
‘신실한 자’는 크리스찬의 소중한 가치관입니다.
헬라어로 ‘Pistos’인 이 말은 ‘믿음대로 행동한다’와 ‘신뢰 할만하다’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크리스천’으로 바라볼 때 ‘믿음대로 행동하고
신뢰할 만하다’는 개념이 우리의 삶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세상을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를
불러주시고 성령을 보내주셔서 예수 주되심을 믿게 하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상속자로 세우셨습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은
당신의 바람을 드러내셨습니다.
‘너희는 지상 나라의 사명을 감당하라’ 이 말씀은 세상에 나가서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신실한 사람인 것을,
믿음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드러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데반 집사의 설교 속에 나타나는
‘광야교회’의 진정한 가치관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가지 모습의 교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는 부름 받은 특권의 교회, 즉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셔서 동일한 성령을 통해 예수를 주로 믿게 하시고
공동체 안에서 예배자로 세우시고 공동체를 섬기는 은혜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이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보냄 받은 교회의 사명을 우리 앞에 드러냅니다.
세상으로 보내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바램입니다.
오늘 예배가 끝나면 진정한 예배가 시작됩니다.
바로 ‘보냄받은 예배’의 시작입니다. 예배당을 나서는
그 순간이 ‘영적 예배’의 시작이며 그것이 교회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세상에 드러나는 영향력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제사장 나라가 되어라, 너희를 통해서 내가 너희를
구속했음을 알게하고 너희를 통해서 이방 민족, 그들 또한
구원 얻길 바란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였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네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라’는 성령의 명령을 실행하는 현장이
사도행전에 드러납니다.
*진정한 기독교의 힘은 약함에 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어떤 사람입니까? 세상 속에서 내가 믿는
그 믿음을 전인격, 전 삶을 다해서 살아내는 사람입니다,
감추면 안 됩니다. 드러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진정한 힘은
인간의 ‘강함’이 아닌 ‘약함’ 속에 있습니다.
은혜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 반응하거나 응답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의지. 종교적인 열심, 그 어떤 뛰어난 지식으로도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 아니면 철저하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고백하고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교회다운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6-29)
은혜 아니면 그 어떤 것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세상의 부유함과 권세, 지식를 가졌어도 하나님이 은혜로
불러주시지 않았다면 우린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강력한 힘은
언제나 ‘예수 십자가’ 밖에는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누구보다 자랑할 만한 것이 많았지만 오히려 그것은 예수를 대적하는 일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라고 고백하며 예수를 믿는 그 은혜가 가장 소중함을 새롭게 선언합니다. 그것이 바울의 가장 유일하고 강력한 ‘힘’ 이었습니다.
*세상이 기대하는 '바로 그 삶을!' 살아가라!
“십자가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패배를 통해 승리하시고
약함과 섬김을 통해 힘을 얻으시며 모든 것을 내어 줌으로써
부요해지신다." ㅡ 팀 켈러
역설적이지만 교회는 세상에서 힘을 과시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드러나야 합니다.
세상은 지속적으로 교회를 대적하고 비방합니다.
그것은 ‘교회는, 믿는사람 이라면 어떠해야 한다’라는
교회에 대한 ‘기대치’가 그만큼 높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부당해 보일 수 있지만, 교회는 하나님이 주권자이시고
하나님으로 사는 삶의 원리가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이 ‘요구’하는 삶이 아니라
세상이 ‘기대’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믿는 자’다운 모습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 앞에 영향력을 드러내지 못하면 치명적인
과오가 드러나게 됩니다. 즉, 하나님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지극히 섬기고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간다면
세상 사람들도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만 그 반대라면
그들도 하나님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잘못된 삶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하나님을 추방해 버리는 결과를 빚어내게 됩니다.
*‘신앙의 위인들은 규칙이나 원리나 도덕률이 아니라
참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모할 때 경건한 삶을
살 수 있다고 가르쳤다. 거룩한 삶은 인격적인 관계에서 비롯된다.
하나님을 가까이할 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 ㅡ게리 토머스
신앙인이라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저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계시는 것 같다’라는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사모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과 가까이 할 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모범적인 영적인 삶은 ‘세상을 본받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찰하고
이것을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영적 예배’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예배는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시작입니다.
잠시 후면, 삶의 예배가 시작됩니다.
예배당에서의 예배는 잠깐이지만 여러분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새로운 예배, 즉 영적 예배가 이제 여러분
삶 속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삶의 예배를 통해 여러분의 진정한 ‘교회다움’이 드러날 것입니다.
‘모이는 교회’는 여기까지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다양한 직분으로 헌신하지만
지금 이후 ‘흩어지는 교회’에서는 더 이상 어떤 타이틀이 아닌
‘하나님의 사람다움’을 드러내는 영향력만 남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예배가 되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생명력을
파급시키는 현장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아무리 시대가 어렵고 힘들어도 세상 앞에
그 영향력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야만 된다는 것이
‘광야교회’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부름받은 특권’ 속에서 받기만을 바라고 하나님을 독점하며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하나님인 것처럼 광야를 걸었던
이스라엘의 모습이 아닌, ‘보냄받은’ 하나님 나라의
제사장으로서의 영향력을 드러내는 진정한 교회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모이는 것’에 집중하며 자신의 욕구 충족에 하나님을
동원 시키는데 급급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보냄 받은 교회’로서
우리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더욱더 중요시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지금처럼 어려운 세상 속에서 교회는 약함을 통해,
또 세상을 향한 섬김을 통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보듬고 복음을 통해서
세상을 회복해 나가는, 그러한 ‘교회다운 영향력’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진정한 예배자로 다시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세상 속에서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떠할지,
하나님은 기대하실 겁니다, 자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말씀이 끝나고 목사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세상속으로 나가야 합니다.
직장과 가정과 삶속에서 하나님의 영향력을 드러내야 합니다.
세상속으로 파송하는 의미로
교회 문 쪽을 향하여 돌아서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3부 11시예배 ....
부름 받은 특권뿐만 아니라
보냄 받은 사명 앞에 응답합시다.
내가 누구인가 정체성을 드러냅시다.
누구와 함께 하는지 어떤 삶을 사는지 !!
보냄 받은 교회의 삶을 살아 내는가 !!
오늘 예배가 끝나고 나가면
삶의 현장에서의 영적 예배가 시작됩니다.
다른 스타일의 예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세상속으로 직장으로 가정으로
보냄 받은 교회의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 교회다운 삶의 모습으로
승리하는 한 주가 됩시다.
'광야 교회의 신앙인!(II)'(행7:33~38)
교회는 하나님 가슴에서 출발한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창1장을 보면 최초의 교회의 모습인 에덴동산이 등장합니다.
하나님 아니면 안 되는 곳,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공급받고
하나님과 더불어 연합했던 그 현장이 바로 에덴동산이었고
그것이 교회의 롤모델 이었습니다.
인간에게 죄가 들어온 후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어 세상에 퍼져
자기들의 우상을 만들어 섬기며 하나님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은 세상 속에서 당신의 백성을 부르십니다.
창세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에녹, 노아, 아브라함을 시작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하게 하시고 광야로 이끌어 내시기까지
하나님의 부르심은 점점 거대해지고 확장되어 갑니다.
스데반 집사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광야 길을 걷는
그 모든 여정이 ‘광야교회’의 모습이라는 것을 설교를 통해서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교회’라는 이 말은 ‘불러내다’라는 뜻으로 히브리어로
‘Qahal’(카할), 헬라어로는 ‘Ekklesia’(에클레시아)이며
즉, ‘불러내어 하나의 거룩한 회중을 이루게 하셨다’라는
의미로 ‘교회’라는 뜻을 갖습니다.
매일매일 똑같고 고달픈 광야였지만
그 현장은 바로 ‘교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 생활로부터
하나님께로부터 부름 받았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우리의 죄와 연관 시켜서 설명을 합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이 말씀은 ‘구원했다’는 것입니다.
무려 430년 노예생활하던 이집트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구속하신 것이 ‘광야’였습니다.
그 출애굽의 현장에는 ‘유월절’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혈통이나 민족성이
아닌 ‘어린양의 피’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 됐다는 선언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출애굽기 19:1-6)
‘내가 너를 구속하였다. 너는 이제 내 백성이 되었다.
그러므로 너희가 제사장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염원이었습니다.
교회는 두 가지 입니다. ‘부름 받은 특권’이 있고
‘보냄 받은 소명’이 있습니다.
세상으로 보내시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네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내게 성령 주셔서 우리 맘을 감동케 하시고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
부활이 나를 위한 것임을 믿게 하시고 살아계신 성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하신 이 모든 것이 ‘은혜’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얻는 믿음에 있어서 인간은 철저하게 수동적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내가 거룩한 반응과 응답의 삶을 살도록
역사하실 것입니다.
‘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데살로니가전서 1:4-5)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은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진정한 성령의 능력은 우리 안에 오셔서 확신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오직 은혜입니다. 나의 모든 헌신과 열심도, 나름대로 세운
어떤 공로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오직 은혜만이 우리 신앙의 기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의 신분
‘은혜’는 신앙의 기본이며 우리는 여기서 더 성숙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 믿는 ‘우리의 신분’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는 ‘성도’,
또 하나는 ‘신실한 자’입니다.
*1. 성도
1) 구별된 자 똑같은 무리 속에서 나를 부르심
‘성도’란 개념 속에는 ‘구별되었다’라는 의미가 포함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별하시고 부르셨습니다. ‘넌 내 백성이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당신의 백성으로 나를 구별하셨습니다.
세상의 수 많은 사람들 중에 왜 나를 구별하셨을까요?
은혜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사신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우리는 ‘성전’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청결케 하시고 당신의 성전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여전히 세상의 가치관으로 가득한 우리 마음에,
우리 인격 속에 찾아오셔서 성령의 전으로 삼으셨습니다.
그 성령이 우리 안에 내재하신 이유는 바로 ‘은혜’ 아니면
설명할 수 없습니다. 또 그 증거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주로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비록 믿지 않는 사람들과 보기에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이것이 내가 구별되었고 성전 되었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2)거룩함을 입은 자
거룩은 어떤 경건한 모양으로 단순히 ‘살아가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 내가 ‘구분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살아가다가도
매 순간 ‘아! 하나님이 나를 구분하셨지’ 하며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 편에 속해 있는 자답게 사는 것을
‘거룩’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원래 거룩하지 않았습니다.
세상과 죄와 연합하며 살았던 우리를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으로
구별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분의 자녀답게 살려는 거룩한 시도를
끊임없이 선언해야 하며 그것이 ‘거룩성’입니다.
단순히 성경을 가까이 두고 살아가는것이 아닌
우리 자신의 ‘의식적인 선언’이 필요합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한 ‘원리’입니다.
*2. 신실한 자
‘신실한 자’는 크리스찬의 소중한 가치관입니다.
헬라어로 ‘Pistos’인 이 말은 ‘믿음대로 행동한다’와 ‘신뢰 할만하다’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크리스천’으로 바라볼 때 ‘믿음대로 행동하고
신뢰할 만하다’는 개념이 우리의 삶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세상을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를
불러주시고 성령을 보내주셔서 예수 주되심을 믿게 하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상속자로 세우셨습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은
당신의 바람을 드러내셨습니다.
‘너희는 지상 나라의 사명을 감당하라’ 이 말씀은 세상에 나가서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신실한 사람인 것을,
믿음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드러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데반 집사의 설교 속에 나타나는
‘광야교회’의 진정한 가치관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가지 모습의 교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는 부름 받은 특권의 교회, 즉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셔서 동일한 성령을 통해 예수를 주로 믿게 하시고
공동체 안에서 예배자로 세우시고 공동체를 섬기는 은혜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이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보냄 받은 교회의 사명을 우리 앞에 드러냅니다.
세상으로 보내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바램입니다.
오늘 예배가 끝나면 진정한 예배가 시작됩니다.
바로 ‘보냄받은 예배’의 시작입니다. 예배당을 나서는
그 순간이 ‘영적 예배’의 시작이며 그것이 교회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세상에 드러나는 영향력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제사장 나라가 되어라, 너희를 통해서 내가 너희를
구속했음을 알게하고 너희를 통해서 이방 민족, 그들 또한
구원 얻길 바란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였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네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라’는 성령의 명령을 실행하는 현장이
사도행전에 드러납니다.
*진정한 기독교의 힘은 약함에 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어떤 사람입니까? 세상 속에서 내가 믿는
그 믿음을 전인격, 전 삶을 다해서 살아내는 사람입니다,
감추면 안 됩니다. 드러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진정한 힘은
인간의 ‘강함’이 아닌 ‘약함’ 속에 있습니다.
은혜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 반응하거나 응답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의지. 종교적인 열심, 그 어떤 뛰어난 지식으로도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 아니면 철저하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고백하고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교회다운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6-29)
은혜 아니면 그 어떤 것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세상의 부유함과 권세, 지식를 가졌어도 하나님이 은혜로
불러주시지 않았다면 우린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강력한 힘은
언제나 ‘예수 십자가’ 밖에는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누구보다 자랑할 만한 것이 많았지만 오히려 그것은 예수를 대적하는 일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라고 고백하며 예수를 믿는 그 은혜가 가장 소중함을 새롭게 선언합니다. 그것이 바울의 가장 유일하고 강력한 ‘힘’ 이었습니다.
*세상이 기대하는 '바로 그 삶을!' 살아가라!
“십자가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패배를 통해 승리하시고
약함과 섬김을 통해 힘을 얻으시며 모든 것을 내어 줌으로써
부요해지신다." ㅡ 팀 켈러
역설적이지만 교회는 세상에서 힘을 과시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드러나야 합니다.
세상은 지속적으로 교회를 대적하고 비방합니다.
그것은 ‘교회는, 믿는사람 이라면 어떠해야 한다’라는
교회에 대한 ‘기대치’가 그만큼 높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부당해 보일 수 있지만, 교회는 하나님이 주권자이시고
하나님으로 사는 삶의 원리가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이 ‘요구’하는 삶이 아니라
세상이 ‘기대’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믿는 자’다운 모습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 앞에 영향력을 드러내지 못하면 치명적인
과오가 드러나게 됩니다. 즉, 하나님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지극히 섬기고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간다면
세상 사람들도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만 그 반대라면
그들도 하나님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잘못된 삶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하나님을 추방해 버리는 결과를 빚어내게 됩니다.
*‘신앙의 위인들은 규칙이나 원리나 도덕률이 아니라
참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모할 때 경건한 삶을
살 수 있다고 가르쳤다. 거룩한 삶은 인격적인 관계에서 비롯된다.
하나님을 가까이할 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 ㅡ게리 토머스
신앙인이라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저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계시는 것 같다’라는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사모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과 가까이 할 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모범적인 영적인 삶은 ‘세상을 본받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찰하고
이것을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영적 예배’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예배는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시작입니다.
잠시 후면, 삶의 예배가 시작됩니다.
예배당에서의 예배는 잠깐이지만 여러분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새로운 예배, 즉 영적 예배가 이제 여러분
삶 속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삶의 예배를 통해 여러분의 진정한 ‘교회다움’이 드러날 것입니다.
‘모이는 교회’는 여기까지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다양한 직분으로 헌신하지만
지금 이후 ‘흩어지는 교회’에서는 더 이상 어떤 타이틀이 아닌
‘하나님의 사람다움’을 드러내는 영향력만 남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예배가 되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생명력을
파급시키는 현장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아무리 시대가 어렵고 힘들어도 세상 앞에
그 영향력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야만 된다는 것이
‘광야교회’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부름받은 특권’ 속에서 받기만을 바라고 하나님을 독점하며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하나님인 것처럼 광야를 걸었던
이스라엘의 모습이 아닌, ‘보냄받은’ 하나님 나라의
제사장으로서의 영향력을 드러내는 진정한 교회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모이는 것’에 집중하며 자신의 욕구 충족에 하나님을
동원 시키는데 급급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보냄 받은 교회’로서
우리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더욱더 중요시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지금처럼 어려운 세상 속에서 교회는 약함을 통해,
또 세상을 향한 섬김을 통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보듬고 복음을 통해서
세상을 회복해 나가는, 그러한 ‘교회다운 영향력’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진정한 예배자로 다시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세상 속에서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떠할지,
하나님은 기대하실 겁니다, 자 이제부터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