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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부
작성일
2022-05-15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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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
5월 15일 2 ㅡ5부현장예배 ㅡ 불안, 시선의 문제 (창29 : 31ㅡ35)
9시 .... 2부 현장예배
11시_3부 예배
불안, 시선의 문제 (창29 : 31ㅡ35)
흔히 사회에서 중요한 지위에 있는 사람을
‘이름있는 사람’이라고 부르고
그 반대의 경우를 ‘이름 없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은 어떤 동기 때문에 ‘이름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가?
다시 말하면 어떤 동기 때문에 우리는 ‘높은 지위’를 얻으려고 하는가?
알랭 드 보통은 돈, 명성, 영향력에 대한 갈망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돈, 명성, 영향력 그 자체는 목적이 아니에요.
사회적으로 우리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를 바라는 이유는
그곳에서 얻는 물질이나 권력 자체가 목적이라 보다는
사람들에게 관심과 인정을 더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거에요.
바로 “돈과 명성, 그리고 영향력을 이용하여 획득한 높은 지위가
“나 자신이 타인에게 사랑을 얻을 수 있는 수단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타인에게 사랑(인정)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우리의 내면 밑바닥에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사랑받는 자리와 무시 받는 자리 사이에서 갈팡질망 할 때
우리의 내면에 숨어있는 ‘불안’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책 <불안> 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동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나은 모습을 보일 때 받는
그 느낌 이것이야말로 ‘불안’의 원천이다.”
이렇듯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자신과 동등하다고 여긴 여동생이 그녀보다 나은 모습을 바라보며
일평생 불안 가운데 살아야만 했던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녀는 ‘사랑받는 자리’와 ‘무시 받는 자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그녀의 이름은 레아입니다.
성경은 그녀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17절 레아는 안력이 부족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성경 전체를 살펴봐도 ‘안력(시력)이 나빴다’라고 말하는 인물은 레아가 유일해요.
레아는 별로 예쁘지도 않았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성경이 라헬에 대해서 대조적으로 “예뻤다”고 말하기 때문이에요.
그저 레아의 외모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아요.
이렇듯 성경은 라헬은 예쁘다고 말했지만 레아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어요.
슬프지만 침묵에도 메세지가 있습니다.
게다가 제가 히브리어로 찾아보니까 ‘안력이 약하다’는 말은
말 그대로 ‘눈이 나쁘다'는 뜻도 있지만,
한편으로 '외모가 아름답지 못하다'는 뜻도 있어요.
동등한 자매 지간이었고 오히려 맏딸로서 늘 동생을 돌보아야 했을 거에요.
그런데 주위 사람들이 동생을 자신보다 나은 모습으로 여기는 환경 속에서
자란 레아의 마음에는 언제나 불안감으로 가득찬 인생이었을 거에요.
‘나’라는 존재가 주위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으로 인해
레아의 내면에는 심각한 불안감이 존재했을 거에요.
어느 날 야곱이라는 한 남자가 그녀의 집에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항상 라헬에게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18절 야곱이 라헬을 연애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봉사하리이다
야곱이 라헬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 ‘라헬을 위해 7년을 섬기겠다’고 말합니다.
당시엔 여인을 얻기 위해서는 보통 1년을 섬기는 것이 관례였지만.
7배의 기간 동안 섬기겠다는 것은
야곱이 얼마나 라헬을 사랑했는지를 말해줍니다.
하지만, 레아는 결혼한 첫날 밤을 사기 치는 것으로 그녀의 결혼이 시작됩니다.
22-23절 라반이 그곳 사람을 다 모아 잔치하고
저녁에 그 딸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가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가니라.
야곱은 신혼 첫날 찬란한 아침 햇살이 눈을 간지럽히는 설레임과
행복감으로 눈을 떴지만
“7년 동안 일하며 간절히 원했던 여인이 자신의 옆에 있다”는
행복감에 아내의 얼굴을 쳐다보았는데
신부의 얼굴을 확인한 야곱이 어떤 반응을 했을까요?
그리고 이렇게 ‘무시 받는 자리’에 선 레아의 기분은 어땠을까요?
그녀는 남편 야곱에게 ‘사랑받는 자리’가 아닌 늘 ‘무시 받는 자리’에 서 있었어요.
여러분 무관심의 결과는 참혹합니다.
사람이 견디기 힘든 아픔이 뭔지 아십니까?
사람들로부터 ‘이름 없는 존재’가 되는 거에요.
그런데 정작 극복하기 힘든 것은 다른 사람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에요.
‘나 자신이 나를 바라보는 이미지’입니다.
‘이름 없는 자리’에 서 있는 자신이 ‘나’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나는 이름 없는 사람이야, 나는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야.”
내가 나를 바라보는 그 시선이 내면의 불안감을 증폭시켜요.
어쩔 수 없는 결혼이었지만 사람은 희망이 있어야 살 수 있잖아요.
그래서 레아도 희망을 품습니다.
자신이 동생 라헬과 비교할 때 그녀만의 강점이 있었어요.
"내가 아이를 낳고 아들을 많이 낳으면 남편 야곱이 나를 사랑해주겠지, 인정해 주겠지!” 라는
희망을 가지고 아기를 낳는데 집중을 합니다.
32절 레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권고하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하지만 야곱은 사랑해주지 않습니다.
레아는 두 번째 아들을 낳았습니다.
33절 그가 다시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의 총이 없음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도 주셨도다 하고 그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그래도 야곱은 사랑해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레아는 세 번째 아들을 낳았습니다.
34절 그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이만큼 아들을 낳았으니까 이제는 남편이 자신과 연합할 거라는 생각에 ‘레위’라고 지었습니다.
레위라는 이름은 ‘연합하다’라는 뜻이에요.
하지만 야곱은 여전히 레아를 거들떠보지 않아요.
레아는 아들 셋을 낳을 때까지 아들을 통해
남편의 사랑을 받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레아는 네 번째 아들을 낳습니다.
35절 그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인하여 그가 그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여러분 환경은 전혀 달라진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레아의 시선이 바뀝니다.
‘레나타 살레츨’이 쓴 <불안들>이라는 책을 보면 그 책에서 ’라캉’이라는 심리학자는
우울증과 불안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기준이 철저히 타인에게 있는데서 생긴다’고 말합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보다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니?"라는 질문에서 불안이
발생 한다는 거에요.
여러분은 자신을 바라보는 기준이 여러분 자신인가요?
아니면 타인인가요?
인간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어요.
한마디로 인간의 시선은 병이 들었어요.
병든 나의 눈으로 나 자신을 건강하게 바라볼 수 없어요.
그리고 타인의 병든 눈으로도 우리 자신을 건강하게 바라볼 수 없어요.
레아가 고백합니다.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유다’의 이름은 ‘여호와를 찬송하는 자’라는 뜻이에요.
그녀는 병든 자신의 시선도 타인의 시선도 아닌 하나님께 자신의 시선을 돌립니다.
그녀는 이제 ‘이름있는 자’ ‘이름 없는 자’의 자리에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1) 사람의 관점으로 볼 때 야곱의 진짜 아내는 레아가 아닌 라헬로 보였어요.
하지만 2) 하나님의 관점에서 야곱의 진정한 아내는 라헬이 아니라 레아였습니다.
이름 없고 무시 받는 존재였던 레아가 변하지 않는 차가운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의 고백이 담겨 있는 이름 그 이름 자신의 아들에게 지어줍니다.
그녀가 지은 아들의 이름은 더 이상 이름이 없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레아 역시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유다’ ㅡ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바로 유다의 후손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때로 타인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지
그래서 타인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지 불안을 느낍니다.
하지만 병든 우리의 시선으로도 병든 타인에 시선으로도
결코 우리 내면 안에 있는 불안을 해결할 수 없어요.
변하지 않는 차가운 현실 속에서 하나님께 우리의 시선을 돌릴 때
우리의 내면에는 불안이 아닌 찬양이 흐르고 하나님의 자존감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여러분 불안은 단지 우리의 시선의 문제입니다.
타인의 시선을 벗어나 자기 자신을 스스로 사랑해야합니다
죄악된 시선으로 왜곡된 시선으로 본다면 위험해집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환경은 변하지 않았지만
레아의 시선이 변했어요.
여호와 하나님의 시선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아들을 유다라고 여호와를 찬양하는자로
자신의 신앙고백을 담은 이름을 유다라 부르는데
그 유다는 더이상 이름없는자가 아닙니다
유다지파를 통해 다윗이 태어나고
유다지파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이땅 가운데 오신것입니다
관심받지 못해 우리의 내면가운데 불안감이 존재하나요?
우리 환경이 바뀌지 않을지라도
주도권을 하나님게 맡기고 하나님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십시오 !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속에서는 우리 한 명 한 명의 이름이 크게 쓰여질 것입니다
너를 통해 나의 나라가 이루어질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얻은 우리들은 하나님의 존귀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 은혜가 저와 여러분 가운데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11시_3부 예배
불안, 시선의 문제 (창29 : 31ㅡ35)
흔히 사회에서 중요한 지위에 있는 사람을
‘이름있는 사람’이라고 부르고
그 반대의 경우를 ‘이름 없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은 어떤 동기 때문에 ‘이름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가?
다시 말하면 어떤 동기 때문에 우리는 ‘높은 지위’를 얻으려고 하는가?
알랭 드 보통은 돈, 명성, 영향력에 대한 갈망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돈, 명성, 영향력 그 자체는 목적이 아니에요.
사회적으로 우리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를 바라는 이유는
그곳에서 얻는 물질이나 권력 자체가 목적이라 보다는
사람들에게 관심과 인정을 더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거에요.
바로 “돈과 명성, 그리고 영향력을 이용하여 획득한 높은 지위가
“나 자신이 타인에게 사랑을 얻을 수 있는 수단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타인에게 사랑(인정)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우리의 내면 밑바닥에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사랑받는 자리와 무시 받는 자리 사이에서 갈팡질망 할 때
우리의 내면에 숨어있는 ‘불안’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책 <불안> 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동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나은 모습을 보일 때 받는
그 느낌 이것이야말로 ‘불안’의 원천이다.”
이렇듯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자신과 동등하다고 여긴 여동생이 그녀보다 나은 모습을 바라보며
일평생 불안 가운데 살아야만 했던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녀는 ‘사랑받는 자리’와 ‘무시 받는 자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그녀의 이름은 레아입니다.
성경은 그녀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17절 레아는 안력이 부족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성경 전체를 살펴봐도 ‘안력(시력)이 나빴다’라고 말하는 인물은 레아가 유일해요.
레아는 별로 예쁘지도 않았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성경이 라헬에 대해서 대조적으로 “예뻤다”고 말하기 때문이에요.
그저 레아의 외모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아요.
이렇듯 성경은 라헬은 예쁘다고 말했지만 레아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어요.
슬프지만 침묵에도 메세지가 있습니다.
게다가 제가 히브리어로 찾아보니까 ‘안력이 약하다’는 말은
말 그대로 ‘눈이 나쁘다'는 뜻도 있지만,
한편으로 '외모가 아름답지 못하다'는 뜻도 있어요.
- 레아의 인생에 얼마나 마음의 상처가 많았을까요?
동등한 자매 지간이었고 오히려 맏딸로서 늘 동생을 돌보아야 했을 거에요.
그런데 주위 사람들이 동생을 자신보다 나은 모습으로 여기는 환경 속에서
자란 레아의 마음에는 언제나 불안감으로 가득찬 인생이었을 거에요.
‘나’라는 존재가 주위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으로 인해
레아의 내면에는 심각한 불안감이 존재했을 거에요.
어느 날 야곱이라는 한 남자가 그녀의 집에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항상 라헬에게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18절 야곱이 라헬을 연애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봉사하리이다
야곱이 라헬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 ‘라헬을 위해 7년을 섬기겠다’고 말합니다.
당시엔 여인을 얻기 위해서는 보통 1년을 섬기는 것이 관례였지만.
7배의 기간 동안 섬기겠다는 것은
야곱이 얼마나 라헬을 사랑했는지를 말해줍니다.
하지만, 레아는 결혼한 첫날 밤을 사기 치는 것으로 그녀의 결혼이 시작됩니다.
22-23절 라반이 그곳 사람을 다 모아 잔치하고
저녁에 그 딸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가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가니라.
야곱은 신혼 첫날 찬란한 아침 햇살이 눈을 간지럽히는 설레임과
행복감으로 눈을 떴지만
“7년 동안 일하며 간절히 원했던 여인이 자신의 옆에 있다”는
행복감에 아내의 얼굴을 쳐다보았는데
신부의 얼굴을 확인한 야곱이 어떤 반응을 했을까요?
그리고 이렇게 ‘무시 받는 자리’에 선 레아의 기분은 어땠을까요?
그녀는 남편 야곱에게 ‘사랑받는 자리’가 아닌 늘 ‘무시 받는 자리’에 서 있었어요.
여러분 무관심의 결과는 참혹합니다.
사람이 견디기 힘든 아픔이 뭔지 아십니까?
사람들로부터 ‘이름 없는 존재’가 되는 거에요.
그런데 정작 극복하기 힘든 것은 다른 사람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에요.
‘나 자신이 나를 바라보는 이미지’입니다.
‘이름 없는 자리’에 서 있는 자신이 ‘나’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나는 이름 없는 사람이야, 나는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야.”
내가 나를 바라보는 그 시선이 내면의 불안감을 증폭시켜요.
어쩔 수 없는 결혼이었지만 사람은 희망이 있어야 살 수 있잖아요.
그래서 레아도 희망을 품습니다.
자신이 동생 라헬과 비교할 때 그녀만의 강점이 있었어요.
"내가 아이를 낳고 아들을 많이 낳으면 남편 야곱이 나를 사랑해주겠지, 인정해 주겠지!” 라는
희망을 가지고 아기를 낳는데 집중을 합니다.
32절 레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권고하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하지만 야곱은 사랑해주지 않습니다.
레아는 두 번째 아들을 낳았습니다.
33절 그가 다시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의 총이 없음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도 주셨도다 하고 그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그래도 야곱은 사랑해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레아는 세 번째 아들을 낳았습니다.
34절 그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이만큼 아들을 낳았으니까 이제는 남편이 자신과 연합할 거라는 생각에 ‘레위’라고 지었습니다.
레위라는 이름은 ‘연합하다’라는 뜻이에요.
하지만 야곱은 여전히 레아를 거들떠보지 않아요.
레아는 아들 셋을 낳을 때까지 아들을 통해
남편의 사랑을 받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레아는 네 번째 아들을 낳습니다.
35절 그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인하여 그가 그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여러분 환경은 전혀 달라진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레아의 시선이 바뀝니다.
‘레나타 살레츨’이 쓴 <불안들>이라는 책을 보면 그 책에서 ’라캉’이라는 심리학자는
우울증과 불안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기준이 철저히 타인에게 있는데서 생긴다’고 말합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보다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니?"라는 질문에서 불안이
발생 한다는 거에요.
여러분은 자신을 바라보는 기준이 여러분 자신인가요?
아니면 타인인가요?
인간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어요.
한마디로 인간의 시선은 병이 들었어요.
병든 나의 눈으로 나 자신을 건강하게 바라볼 수 없어요.
그리고 타인의 병든 눈으로도 우리 자신을 건강하게 바라볼 수 없어요.
레아가 고백합니다.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유다’의 이름은 ‘여호와를 찬송하는 자’라는 뜻이에요.
그녀는 병든 자신의 시선도 타인의 시선도 아닌 하나님께 자신의 시선을 돌립니다.
그녀는 이제 ‘이름있는 자’ ‘이름 없는 자’의 자리에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1) 사람의 관점으로 볼 때 야곱의 진짜 아내는 레아가 아닌 라헬로 보였어요.
하지만 2) 하나님의 관점에서 야곱의 진정한 아내는 라헬이 아니라 레아였습니다.
이름 없고 무시 받는 존재였던 레아가 변하지 않는 차가운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의 고백이 담겨 있는 이름 그 이름 자신의 아들에게 지어줍니다.
그녀가 지은 아들의 이름은 더 이상 이름이 없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레아 역시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유다’ ㅡ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바로 유다의 후손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때로 타인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지
그래서 타인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지 불안을 느낍니다.
하지만 병든 우리의 시선으로도 병든 타인에 시선으로도
결코 우리 내면 안에 있는 불안을 해결할 수 없어요.
변하지 않는 차가운 현실 속에서 하나님께 우리의 시선을 돌릴 때
우리의 내면에는 불안이 아닌 찬양이 흐르고 하나님의 자존감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여러분 불안은 단지 우리의 시선의 문제입니다.
타인의 시선을 벗어나 자기 자신을 스스로 사랑해야합니다
죄악된 시선으로 왜곡된 시선으로 본다면 위험해집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환경은 변하지 않았지만
레아의 시선이 변했어요.
여호와 하나님의 시선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아들을 유다라고 여호와를 찬양하는자로
자신의 신앙고백을 담은 이름을 유다라 부르는데
그 유다는 더이상 이름없는자가 아닙니다
유다지파를 통해 다윗이 태어나고
유다지파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이땅 가운데 오신것입니다
관심받지 못해 우리의 내면가운데 불안감이 존재하나요?
우리 환경이 바뀌지 않을지라도
주도권을 하나님게 맡기고 하나님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십시오 !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속에서는 우리 한 명 한 명의 이름이 크게 쓰여질 것입니다
너를 통해 나의 나라가 이루어질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얻은 우리들은 하나님의 존귀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 은혜가 저와 여러분 가운데 가득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