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기자부
작성일
2022-07-10 09:57
조회
1113
7월 10일 2ㅡ5부예배
9시 2부 예배
11시_3부예배
복음, 우리를 의롭게 하는 은혜 (갈라디아서2:16ㅡ20)
오래전에 영국에서 비교종교학 회의가 열렸습니다.
각국에서 모인 전문가들이
종교학적으로 볼 때 기독교의 독특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의하였습니다.
먼저 성육신에 대해서. 부활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종교마다 비슷한 것들이 많기 때문에 기독교의 독특성을 말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 C.S. 루이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성이라면 쉬운 것이 아닙니까?
그것은 바로 은혜 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다른 종교들과 다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셨다’고 말합니다.
“인간을 죄로인해 하나님의 곁을 떠났는데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찾아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와 심판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바로 은혜 입니다.
여기서 은혜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과분한 호의이며 분에 넘치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에 대한 구체적인 메시지가 바로 복음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이 중요한 단어가 갈라디아서에서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16절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
중요한 단어는 바로 “의롭게 하다”는 동사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이 단어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결코 기독교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진리다.
그것은 또한 모든 기독교의 교리의 주요 조항으로
그 안에 모든 경건함에 대한 지식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조항을 잘 알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며 끊임없이 머리에 새겨야 한다
그리고 마틴 루터가 강조하는 복음의 진리를 신학적인
용어로 ‘칭의 교리’라고 부릅니다.
칭의는 법적인 용어로 법정에서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이것은 정죄의 반대말입니다.
그리고 ‘정죄하다’는 말은 어떤 사람을 유죄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의롭다는 그가 죄가 없다는 것이 결백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의롭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용서하시고
무죄로 만드실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를 받아주시고 의로운 자로 여기시는 것이 바로 칭의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은혜’라는 것입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에 추가한
’율법’은 ‘십계명을 포함한 하나님의 계명 전체’를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이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혹독하게
율법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으로 너희는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
너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겨야 하며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 그리고 하나님을 공경하고 너희의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
너희는 간음이나 살인 그리고 도적질을 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이러한 도덕법을 지켜야 할 뿐만 아니라
너희는 할례라는 의식법도 지켜야만 한다.
그러면 너희는 율법을 지킨 행위에 의해 의롭다 함을 얻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의 구원관 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이렇게 책망합니다.
롬10:3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것을 모르고
스스로 의롭게 되려고 노력하며 의롭다고
인정받는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의롭게 되려고 노력했다
(자기 의)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것은 다른 종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C.S. 루이스가 말한 것 처럼
불교에서 고행과 선행을 주장합니다.
흰두교는 업보(산스크리트어, Karma)를 이야기 합니다.
그들은 업보를 끊기 위해서 선행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이슬람교는 코란이라는 알라의 율법을 반드시 지켜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르는 일반적인 종교의 모습입니다.
절대 진리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성경은 그 누구도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을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 누구도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애초에 우리에겐 없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정반대입니다.
성경은 인간은 죄로 인해 전적으로 타락하였고
스스로 구원할 능력이 전무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고 신앙 고백을 합니다.
16절“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 구절에 대해서 존 스토트 목사님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단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것 뿐만 아니라
피난처이신 그분께 달려가 그분께 자비를 구하며
그분께 맡기는 행동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지적인 확신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주님께 ‘인격적으로 맡기는 것’까지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내가 죽는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면,
우리의 옛 삶은 끝나고 이제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새로운 삶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사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누구든지
새로운 삶을 살아갈 능력을 소유한다는 것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나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의 영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사시면서
거룩함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새로운 열망을 우리에게 주신다”라고 말한다.
바로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열망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사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도, 마음도, 욕망도, 심지어 삶도 이전과 완전히 바뀌어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단순히 감동이나 정서적인 만족감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신 ‘은혜의 사건’은 우리의 믿음으로 이어져야 하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감동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찬양에 감동을 받고 말씀에 감동을 받고 예배에 감동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감동을 받고 은혜를 받으면
굉장히 만족하고 그것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 우리가 소유해야 할 진짜 신앙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희생에 대해 감동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복음이 우리의 삶으로 이어가는 것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에
“복음의 진리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새로운 열망을 갖게 됩니다.
마틴 루터가 "우리가 복음을 잘 알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며
끊임없이 머리에 새겨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우리는 날마다 복음을 알고 날마다 복음을 가르치고
날마다 복음을 묵상해야만 합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날마다 알고
가르치고 묵상할 때 우리 안에 계신 예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시도록”
거룩함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새로운 열망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내 안에 거하여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식할 때
우리의 삶이 ‘복음의 진리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새로운 열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는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풍성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11시_3부예배
복음, 우리를 의롭게 하는 은혜 (갈라디아서2:16ㅡ20)
오래전에 영국에서 비교종교학 회의가 열렸습니다.
각국에서 모인 전문가들이
종교학적으로 볼 때 기독교의 독특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의하였습니다.
먼저 성육신에 대해서. 부활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종교마다 비슷한 것들이 많기 때문에 기독교의 독특성을 말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 C.S. 루이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성이라면 쉬운 것이 아닙니까?
그것은 바로 은혜 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다른 종교들과 다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셨다’고 말합니다.
“인간을 죄로인해 하나님의 곁을 떠났는데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찾아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와 심판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바로 은혜 입니다.
여기서 은혜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과분한 호의이며 분에 넘치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에 대한 구체적인 메시지가 바로 복음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이 중요한 단어가 갈라디아서에서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16절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
중요한 단어는 바로 “의롭게 하다”는 동사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이 단어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결코 기독교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진리다.
그것은 또한 모든 기독교의 교리의 주요 조항으로
그 안에 모든 경건함에 대한 지식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조항을 잘 알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며 끊임없이 머리에 새겨야 한다
그리고 마틴 루터가 강조하는 복음의 진리를 신학적인
용어로 ‘칭의 교리’라고 부릅니다.
칭의는 법적인 용어로 법정에서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이것은 정죄의 반대말입니다.
그리고 ‘정죄하다’는 말은 어떤 사람을 유죄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의롭다는 그가 죄가 없다는 것이 결백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의롭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용서하시고
무죄로 만드실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를 받아주시고 의로운 자로 여기시는 것이 바로 칭의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은혜’라는 것입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에 추가한
’율법’은 ‘십계명을 포함한 하나님의 계명 전체’를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이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혹독하게
율법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으로 너희는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
너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겨야 하며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 그리고 하나님을 공경하고 너희의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
너희는 간음이나 살인 그리고 도적질을 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이러한 도덕법을 지켜야 할 뿐만 아니라
너희는 할례라는 의식법도 지켜야만 한다.
그러면 너희는 율법을 지킨 행위에 의해 의롭다 함을 얻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의 구원관 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이렇게 책망합니다.
롬10:3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것을 모르고
스스로 의롭게 되려고 노력하며 의롭다고
인정받는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의롭게 되려고 노력했다
(자기 의)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것은 다른 종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C.S. 루이스가 말한 것 처럼
불교에서 고행과 선행을 주장합니다.
흰두교는 업보(산스크리트어, Karma)를 이야기 합니다.
그들은 업보를 끊기 위해서 선행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이슬람교는 코란이라는 알라의 율법을 반드시 지켜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르는 일반적인 종교의 모습입니다.
절대 진리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성경은 그 누구도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을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 누구도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애초에 우리에겐 없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정반대입니다.
성경은 인간은 죄로 인해 전적으로 타락하였고
스스로 구원할 능력이 전무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고 신앙 고백을 합니다.
16절“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 구절에 대해서 존 스토트 목사님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단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것 뿐만 아니라
피난처이신 그분께 달려가 그분께 자비를 구하며
그분께 맡기는 행동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지적인 확신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주님께 ‘인격적으로 맡기는 것’까지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내가 죽는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면,
우리의 옛 삶은 끝나고 이제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새로운 삶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사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누구든지
새로운 삶을 살아갈 능력을 소유한다는 것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나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의 영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사시면서
거룩함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새로운 열망을 우리에게 주신다”라고 말한다.
바로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열망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사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도, 마음도, 욕망도, 심지어 삶도 이전과 완전히 바뀌어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단순히 감동이나 정서적인 만족감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신 ‘은혜의 사건’은 우리의 믿음으로 이어져야 하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감동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찬양에 감동을 받고 말씀에 감동을 받고 예배에 감동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감동을 받고 은혜를 받으면
굉장히 만족하고 그것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 우리가 소유해야 할 진짜 신앙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희생에 대해 감동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복음이 우리의 삶으로 이어가는 것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에
“복음의 진리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새로운 열망을 갖게 됩니다.
마틴 루터가 "우리가 복음을 잘 알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며
끊임없이 머리에 새겨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우리는 날마다 복음을 알고 날마다 복음을 가르치고
날마다 복음을 묵상해야만 합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날마다 알고
가르치고 묵상할 때 우리 안에 계신 예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시도록”
거룩함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새로운 열망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내 안에 거하여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식할 때
우리의 삶이 ‘복음의 진리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새로운 열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는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풍성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