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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부
작성일
2022-07-03 09:56
조회
1454
7월 3일 2ㅡ5부예배 거룩한 회복탄력성(Holy Resilience) (말라기 1:1-6)
9시,... 2부 예배
11시....3부 예배
거룩한 회복탄력성(Holy Resilience) (말라기 1:1-6)
최근 상담학계와 경제학계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개념으로
‘회복 탄력성’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회복탄력성이란 어떤 물체가 외부의 힘에 의해 변형된 상태에서
원래의 상태로 돌아오는 능력을 뜻한다.
마치 우리 몸이 힘을 발휘하려면 강한 근육이 필요한 것처럼
인간의 마음도 강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선 ‘튼튼한 마음의 근육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마음의 힘도 일종의 근육과 같아서
사람마다 마음의 근육의 상태에 따라 견뎌낼 수 있는 무게도 정해져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근육은 훈련을 통해 얼마든지 키울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우리의 몸과 마음의 근육을 훈련을 통해 강화시키듯이
우리의 영적인 근육을 강화시키기 위해
한편으론 우리에겐 영적인 회복탄력성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심각한 영적 침체에 빠져있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우리의 영적 침체의 원인은
바로 죄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죄란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 입니다.
불신앙의 상태에 있을 때 우리의 내면은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우리가 은혜로부터 멀어질 때 하나님에 대해 권태를 느낍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은혜가 사라질 때 우리는 하나님께 싫증을 느낍니다.
그래서 사탄의 성도를 향한 첫 번째 공격 목표는
성도 안에 은혜가 자리를 잡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가 약해지게 되면 죄에 대한 전투력이
급격히 떨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환경 가운데 육체적인 영향과 정서적인 영향
그리고 영적인 영향이 원인이 되어 영적 침체에 빠지곤 합니다.
하지만 오늘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도 모르게 외부의 환경과 시련
그리고 고난에 의해 지치고 탈진되고 권태를 느끼는 저와 여러분의 영성이
다시 본래의 상태로 회복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말라기서가 쓰여진 배경을 살펴보면 바벨론 제국의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힘을 모아서 민족이 고대하던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완성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더 이상 이방인의 땅이 아닌 그들의 조상이 살았던 약속의 땅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 하시는 예루살렘에서 드디어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꿈에 그리던 과거의 영광스런 나라가 회복되기는 커녕
그들의 현실은 여전히 강대국에 의해 지배받는 속국일 뿐이었습니다.
당시의 세계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격동하고 있었습니다.
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은 메대와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하였고
페르시아조차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그런데 전 세계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은 서른 살의 젊은 나이로 죽게 됩니다.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의 충직한 4명의 장군들은
거대한 제국을 네 지역으로 분할하여 통치했습니다.
이러한 혼란스런 시대 속에서 로마라는 대제국이 등장했고
이러한 현실 속에서 이스라엘을 더욱 절망스럽게 한 것은
이스라엘의 원수인 에돔이 자신들보다 더 부유하고
국가적으로도 더 안정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서가 아닌 야곱을 선택하셨습니다.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이 말은 “야곱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신 반면
에서는 멸망시키기로 작정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남 유다는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멸망하였습니다.
하지만 유다를 정복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에서의 자손인
에돔 만큼은 끝내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에돔은 물질적으로 부유했을 뿐만 아니라 난공불락의
천연의 요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바벨론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공격할 때 이스라엘이 민족적으로
커다란 시련을 맞이할 때 에돔은 유다 백성을 조롱하였습니다.
(시137:7)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함락되던 날에 에돔 사람들이 한 짓을 기억하소서.
그들이 `예루살렘성을 헐어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려라!' 하였습니다.
에돔은 폐허가 된 예루살렘 안으로 들어가 하이에나처럼 노략질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다의 살아남은 자들은 잡아다가 바벨론에게 넘겨주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처럼 세상에서 성공한 쪽은 오히려 에돔 족속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하나님의 백성보다 더 잘 살수 있고
나라도 더 부강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세계는 격동하고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는 에돔 족속은 하나님의 백성보다
오히려 더욱 승승장구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현실은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전혀 나아지거나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에돔 족속처럼 실질적으로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이방 국가의 권력자들에게
예물을 바치는데 신경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드린 제물의 숫자는 모자람이 없었지만
하나님께 드린 제물 대부분은 병든 것들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8절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이스라엘 백성은 지극히 현실주의자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그들이 아무리 많은 짐승으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제사를 드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죽은 예배를 드리게 된 이유는 영적침체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 이스라엘 백성에게 영적 침체가 일어난 이유는?
창세기를 읽어보면 에서는 탐욕스러운 사람이었고
야곱은 사기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야곱을 사랑하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린 하나님께서 우릴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하셨고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셨다는 그 사실 때문에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그 사실이 이젠 더 이상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의심하고 반문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우리의 가정이 깨어지는
아픔이 일어나지 않았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육체의 질병이 나아져야만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물질적인 축복을
주시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셔야만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당신은 우리를 속였습니다. 우릴 속이진 않았더라도
당신이 우리를 사랑한다면 그 책임이 뒤따라야만 하는데
당신은 그 책임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우리를 돌보지 않았고 그러므로
하나님 당신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습니다”라고 반문합니다.
이렇듯 우리의 ‘불신앙’으로 인해
우리의 내면에는 하나님에 대한 반감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더 이상 은혜가 머물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은혜로부터 멀어지면 하나님께 대해 권태를 느낍니다.
우리 안에 은혜가 사라질 때 우리는 하나님께 싫증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영적침체는 우리의 불신앙이 근원이며 거룩에 대한 권태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싫증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영적침체에 빠지게 될 때
우리는 ‘형식적으로 예배'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눈먼 것 저는 것 그리고 병든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를 드릴 뿐입니다
영적침체의 원인은 바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신다면 나를 이렇게 내버려 두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부모가 자식을 낳았는데 자식에 대한 양육의 책임을 다하지 않을 때
자식은 오히려 “부모에게 그럴거면 왜 자신을 낳았느냐?고
내가 스스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냐?고 반문한다면
이것이 자식의 한계입니다.
이러한 태도에 머무르게 되면 우리는 결단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담긴 사랑에 대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를 이처럼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해야 하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당연시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오히려 “왜 사랑한다고 해놓고 복 주시지 않고
우릴 속일 수 있습니까?”라며 원망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변함없이 말씀하십니다.
결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능력도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시킬
어떤 능력도 없는 죄라는 감옥에 갇힌 죄인인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단순히 책임과 의무를 강요하는 아버지가 아닙니다.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대신 죽음에 내어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 사랑이 날마다 우리를 새롭게 살립니다
그 사랑이 영적침체에 빠진 우리를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키는
강력한 치유의 능력입니다
11시....3부 예배
거룩한 회복탄력성(Holy Resilience) (말라기 1:1-6)
최근 상담학계와 경제학계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개념으로
‘회복 탄력성’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회복탄력성이란 어떤 물체가 외부의 힘에 의해 변형된 상태에서
원래의 상태로 돌아오는 능력을 뜻한다.
마치 우리 몸이 힘을 발휘하려면 강한 근육이 필요한 것처럼
인간의 마음도 강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선 ‘튼튼한 마음의 근육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마음의 힘도 일종의 근육과 같아서
사람마다 마음의 근육의 상태에 따라 견뎌낼 수 있는 무게도 정해져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근육은 훈련을 통해 얼마든지 키울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우리의 몸과 마음의 근육을 훈련을 통해 강화시키듯이
우리의 영적인 근육을 강화시키기 위해
한편으론 우리에겐 영적인 회복탄력성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심각한 영적 침체에 빠져있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우리의 영적 침체의 원인은
바로 죄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죄란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 입니다.
불신앙의 상태에 있을 때 우리의 내면은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우리가 은혜로부터 멀어질 때 하나님에 대해 권태를 느낍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은혜가 사라질 때 우리는 하나님께 싫증을 느낍니다.
그래서 사탄의 성도를 향한 첫 번째 공격 목표는
성도 안에 은혜가 자리를 잡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가 약해지게 되면 죄에 대한 전투력이
급격히 떨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환경 가운데 육체적인 영향과 정서적인 영향
그리고 영적인 영향이 원인이 되어 영적 침체에 빠지곤 합니다.
하지만 오늘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도 모르게 외부의 환경과 시련
그리고 고난에 의해 지치고 탈진되고 권태를 느끼는 저와 여러분의 영성이
다시 본래의 상태로 회복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말라기서가 쓰여진 배경을 살펴보면 바벨론 제국의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힘을 모아서 민족이 고대하던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완성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더 이상 이방인의 땅이 아닌 그들의 조상이 살았던 약속의 땅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 하시는 예루살렘에서 드디어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꿈에 그리던 과거의 영광스런 나라가 회복되기는 커녕
그들의 현실은 여전히 강대국에 의해 지배받는 속국일 뿐이었습니다.
당시의 세계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격동하고 있었습니다.
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은 메대와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하였고
페르시아조차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그런데 전 세계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은 서른 살의 젊은 나이로 죽게 됩니다.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의 충직한 4명의 장군들은
거대한 제국을 네 지역으로 분할하여 통치했습니다.
이러한 혼란스런 시대 속에서 로마라는 대제국이 등장했고
이러한 현실 속에서 이스라엘을 더욱 절망스럽게 한 것은
이스라엘의 원수인 에돔이 자신들보다 더 부유하고
국가적으로도 더 안정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서가 아닌 야곱을 선택하셨습니다.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이 말은 “야곱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신 반면
에서는 멸망시키기로 작정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남 유다는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멸망하였습니다.
하지만 유다를 정복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에서의 자손인
에돔 만큼은 끝내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에돔은 물질적으로 부유했을 뿐만 아니라 난공불락의
천연의 요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바벨론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공격할 때 이스라엘이 민족적으로
커다란 시련을 맞이할 때 에돔은 유다 백성을 조롱하였습니다.
(시137:7)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함락되던 날에 에돔 사람들이 한 짓을 기억하소서.
그들이 `예루살렘성을 헐어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려라!' 하였습니다.
에돔은 폐허가 된 예루살렘 안으로 들어가 하이에나처럼 노략질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다의 살아남은 자들은 잡아다가 바벨론에게 넘겨주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처럼 세상에서 성공한 쪽은 오히려 에돔 족속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하나님의 백성보다 더 잘 살수 있고
나라도 더 부강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세계는 격동하고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는 에돔 족속은 하나님의 백성보다
오히려 더욱 승승장구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현실은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전혀 나아지거나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에돔 족속처럼 실질적으로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이방 국가의 권력자들에게
예물을 바치는데 신경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드린 제물의 숫자는 모자람이 없었지만
하나님께 드린 제물 대부분은 병든 것들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8절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이스라엘 백성은 지극히 현실주의자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그들이 아무리 많은 짐승으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제사를 드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죽은 예배를 드리게 된 이유는 영적침체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 이스라엘 백성에게 영적 침체가 일어난 이유는?
창세기를 읽어보면 에서는 탐욕스러운 사람이었고
야곱은 사기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야곱을 사랑하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린 하나님께서 우릴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하셨고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셨다는 그 사실 때문에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그 사실이 이젠 더 이상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의심하고 반문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우리의 가정이 깨어지는
아픔이 일어나지 않았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육체의 질병이 나아져야만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물질적인 축복을
주시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셔야만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당신은 우리를 속였습니다. 우릴 속이진 않았더라도
당신이 우리를 사랑한다면 그 책임이 뒤따라야만 하는데
당신은 그 책임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우리를 돌보지 않았고 그러므로
하나님 당신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습니다”라고 반문합니다.
이렇듯 우리의 ‘불신앙’으로 인해
우리의 내면에는 하나님에 대한 반감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더 이상 은혜가 머물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은혜로부터 멀어지면 하나님께 대해 권태를 느낍니다.
우리 안에 은혜가 사라질 때 우리는 하나님께 싫증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영적침체는 우리의 불신앙이 근원이며 거룩에 대한 권태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싫증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영적침체에 빠지게 될 때
우리는 ‘형식적으로 예배'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눈먼 것 저는 것 그리고 병든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를 드릴 뿐입니다
영적침체의 원인은 바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신다면 나를 이렇게 내버려 두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부모가 자식을 낳았는데 자식에 대한 양육의 책임을 다하지 않을 때
자식은 오히려 “부모에게 그럴거면 왜 자신을 낳았느냐?고
내가 스스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냐?고 반문한다면
이것이 자식의 한계입니다.
이러한 태도에 머무르게 되면 우리는 결단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담긴 사랑에 대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를 이처럼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해야 하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당연시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오히려 “왜 사랑한다고 해놓고 복 주시지 않고
우릴 속일 수 있습니까?”라며 원망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변함없이 말씀하십니다.
결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능력도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시킬
어떤 능력도 없는 죄라는 감옥에 갇힌 죄인인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단순히 책임과 의무를 강요하는 아버지가 아닙니다.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대신 죽음에 내어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 사랑이 날마다 우리를 새롭게 살립니다
그 사랑이 영적침체에 빠진 우리를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키는
강력한 치유의 능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