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기자부
작성일
2018-01-14 17:28
조회
984
주일 2부 3부 예배....
사도행전적 교회! (행 2: 42~47)
길버트 빌지키언의(트리니티 신학교 교수)
책의 서문에 “교회는 세상의 유일한 소망입니다”라고 적혀있습니다.
이 말은 진리입니다. 교회만이 세상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였기에 완벽한 교회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좀 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나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시도할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이시다”라고
증거 하는 현장이 교회밖에 없기에...
예수만이 생명의 근원이며 교회는 세상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왜 이렇게 초대 교회와 오늘의 교회는 차이가 있는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하는 슬로건도 물론 맞지만,
“성경으로 돌아가자!”하는 말이 더 적합합니다.
성경에 있는 교회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습니까?
바로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신 다음에 교회가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오순절 전과 오순절 이후의 교회는 분명히 나눠집니다.
제자들의 삶도 판이하게 다릅니다. 성령이 임하시기 전의 제자들은 세상적 요소가
너무 많았습니다. 성령이 간헐적으로 일깨워주셔서 예수가 메시아라는 고백을 하지만,
예수님을 통해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그들의 주된 목적이었습니다.
보상을 바랐기에 주님이 십자가를 말씀하실 때 제자들은 다 떠나갑니다.
보상을 바라며 주님을 기다리던 제자들에게 주님이 아닌 성령님이 임하시는
장면이 사도행전 2장 1절에 등장합니다. 그들이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방언은 고린도 교회와 같은 못 알아듣는 방언이 아니라 당시의 외국어였습니다.
세계에 흩어진 수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절기에 맞춰서 응집합니다.
그런데 그때 당시 모인 수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우리가 태어나서 자란 곳의 언어를 들으니 이것이 어찌된 것이뇨?”합니다.
누군가는 “저들이 술에 취했다”며 모독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우리가 술에 취하지 않았다”며 전한 것이 예수, 십자가, 죽으심, 부활입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교회가 세워집니다.
성령이 임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그들이 예수를 주로 믿고
예수를 증거 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가슴에 붙은 불꽃
성령은 지금도 동일하셔서 예수를 주로 고백하게하고
예수를 증거 하는 사역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하면 -방언, 병 고침, 귀신 쫓는 것으로만 압니다.
은혜의공동체도 개척초기에 성령의 역사를 수도 없이 경험했지만
그것으로 사람들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목회를 그만두기로 작정하고 기도원에 올라가 금식하며 기도하며 성경책을 읽는데
그동안 안 들어왔던 단어가 눈에 띄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르쳤다”였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었음에도 그동안 제가 봤던 것은 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는 “가르쳤다”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동그라미를 쳐보았더니
가르침과 기적의 비율이 9:1로 가르쳤다가 많았습니다.
심지어 기적도 가르치기 위한 수단인 표적이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기적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가르치기 위한 표적이었습니다.
복음서를 읽고 사도행전으로 넘어갔습니다.
제가 너무도 좋아하는 사도들이 성령을 받는 장면인데 그날은 평소와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그들이 방언을 말하는데 그 방언은 전 세계에 흩어진 디아스포라가 알아듣는 복음이었습니다.
그 복음을 통해 그들이 회개하고 공동체가 세워졌다는 것을 제가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기사와 이적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살펴봤습니다. 3장에 넘어가면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런 사건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이런 기적만 계속 일어나면 교회가 부흥될 텐데, 이럴 때일수록 베드로와 요한이 자기를
드러내거나 기적을 앞세우지 않고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 부활을 증거 합니다.
오히려 듣는 사람들이 복음 때문에 혼동을 겪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증거합니다.
그들에게 말합니다. “왜 우리를 바라보느냐? 이 사람을 일으켜 세운 것은 우리가 아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를 전할 때 복음이 강력하게 증거 되고 예루살렘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예루살렘에서 교회가 부흥하고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장 8절-
그런데 제자들은 선민사상이 있어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럴 때마다 핍박이 찾아오는데 첫 번째 핍박이 사울이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현장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흩어집니다.
사도들은 사마리아가 더럽다고 생각해서 그곳까지 가지 않았는데
빌립 집사가 가서 복음 전할 때 사마리아에 강력한 부흥이 나타납니다.
12장을 넘어가면 야고보가 순교하고 강력한 핍박이 나타나 그들이 흩어집니다.
흩어진 사람들이 지금의 터키 최남단 안디옥까지 올라갑니다.
거기서 복음을 증거 할 때 최초로 이방인들이 중심이 된 안디옥 교회가 세워집니다.
이후 바울이 모든 사역의 중심이 됩니다. 바울이 사역할 때 많은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의 그림자만 스쳐도 귀신이 쫓아지고, 수건만 갖다 대도 병이 나았습니다.
그런데 점점 더 복음이 증거 되고 확장될 때, 사도행전 28장을 보면,
바울이 로마에 갇혀있는데 거기서 능력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습니다.
28장에 보면 2년 동안 갇혀있으면서 그가 자기에게 찾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가르치는 장면으로 끝이 납니다.
당시 저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아니 화려하게 끝나야 하는데 왜 로마에서 가르쳤더라 하고 끝날까?”
그래서 29장이 있나하고 봤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28장으로 끝나고 로마서로 넘어가게 됩니다.
뭔가 더 있을 거 같으면서 개운하지가 않았습니다.
왜 가르치는 장면으로 끝이 났을까? 그때 제가 금식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신 것은 ‘교회가 하는 일은 가르치는 것이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보인 모범이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의 특권만이 아닌 보내신 소명 앞에 철저하게 응답하는 공동체
*천막에서 출발하여 바로 이 자리까지.......
Act 29. 제 논문에 이렇게 썼습니다. “현대 교회는 사도행전 29장이 되어야 한다.”
사도행전 적 교회가 무엇입니까? 지금 이 시대에 사도행전 적 교회를 끌어오는
핵심적인 개념은 바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교회!
모든 사람들을 가르쳐서 그들을 제자로 세우고 직분을 떠나 모든 사람들이 함께 동역자로
세워져서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 바울은 그와 함께 동역한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합니다.
바울 혼자 한 것이 아닙니다. 함께 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동역자가 되지 않으면 은혜의 교회는 성경적 교회가 되기 쉽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가 좋은 교회인가?”를 떠나서 “내가 좋은 동역자인가?”
질문해봐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위대한 교회인가?”
묻기보다 “내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인가?” 물어봐야 합니다. 우리의 숙제입니다.
은혜의 공동체 비전- 사명 선언문.
- 말씀으로 섬겨서 모든 동역자를 세워라
- 받은바 은혜와 은사를 따라서 서로 상호 사역하는 공동체
- 거룩한 복음의 열정으로 가득한 공동체
- 믿음, 헌신, 순종의 현장감을 드러내는 공동체
*‘이제 우리만 누릴 수 없습니다.’
아직 우리는 진행 중입니다. 32주년이지만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100년이 지나도 끊임없이 진행되어야 합니다. 성경적 교회가 되기 위해서!
은혜의 공동체가 앞으로 더, 더 그 목적을 향해서 나아가는데 사랑하는 동역자들의
눈물과 기도와 헌신이 아름답게 같이 드려지는 현장이 완성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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