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기자부
작성일
2022-06-19 11:00
조회
1269
6월 19일 2ㅡ5부 현장예배
9시 2부예배
3부_11시 예배
영생을 얻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소유해야만 하는가? (막4:35 ㅡ41)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오늘 본문의 등장하는 젊은 관원이 마치
외골격 생물과 같은 인생을 살았다고 평가합니다.
재물과 도덕적 성취는 딱딱한 외골격처럼,
젊은 관원을 보호하고, 생존하게 하는데, 매우 유리했습니다.
하지만 재물과 도덕적 성취는 오히려 하나님과 그 자신을 분리시키고
가로막는 방해장벽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그 껍데기의 보호를 받고 싶어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가로막는 그 방해장벽이 오히려
자기 인생을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안타깝게도 젊은 관원은 자신의 딱딱한 그 껍질을 뚫고
더 높은 상태로 성장하는 것을 스스로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6절)
20절에서는 그 사람이 청년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이미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갖추고 있었고
상당한 재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막10:20, 눅18:21)
이 청년 관원은 어렸을 때부터 훈련받고 도덕적으로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젊은 관원은 그가 속해 있던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달리
예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6절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원어> “그리고 보라(Behold) 한 사람이 그에게 와서”
‘보라 (behold) ’는 단어는 보통
놀라운 사건이 일어나고 있음을 강조할 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마태복음 12장을 살펴보면
마12:1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심지어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논의하였습니다.
아마도 젊은 관원도 산헤드린 공의회에 속한 관원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분위기를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상황을 알고서도 그는 공개된 자리에서
예수님께 나아와 경의를 표하였습니다.
젊은 관원은 어떠한 절박함과 절실함으로 인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을까요?
그의 영혼에는 어느 것으로 메워지지 않는 구멍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원에 대한 목마름 이었어요.
파스칼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워지는 구멍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영혼은 결국 그 구멍이 메워지지 않고 평생 누수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자신의 영혼의 구멍을 메꾸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행합니다.
그리고 이 영혼의 구멍을 메꾸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돈으로
명예로 권력과 사회적 성공으로 메우기 위해 노력합니다.
바로 이것이 부자 청년에 일어난 영적인 문제였습니다.
이 청년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고
무엇을 누릴까의 문제는 죽음 앞에선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지혜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젊은 관원은 영생을 얻는 문제에 있어서
그의 질문의 ‘주어’가 바로 그 자신이었어요.
이 말은 곧 그의 인생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스스로 죽음 이후의 영혼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미리
안전을 확보해 두고 싶었던 것입니다. .
그러나 소경 거지였던 바디매오는 그 ‘주어’가 젊은 관원과 사뭇 달랐습니다.
막10: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부자 청년에게도 이러한 태도가 필요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처절한 절망 가운데 “주님 나를 구원해 주십시오.”
그 이유가 혹시 이 때문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는 인생의 수많은 문제들에 눌린 채 전전긍긍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우리는 주님 앞에 나와서 간절한 마음으로 울부짖습니다.
주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만 합니까?
내가 무엇을 행하는 것이 옳습니까?”
그런데 정작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인생의 주도권을
우리의 손에서 내려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내가 어떻게 해결해야 될지 그 해결책만 달라는 거에요
정작 내 삶의 진정한 주인이신 주님께 나의 주도권을 내어드리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답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고 맙니다.
먼저 우리의 인생의 주어가 바뀌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인생이 주인이 되셔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역설적으로 젊은 관원에게
너는 선한 일을 행함으로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계명을 지킬 일이지 왜 나를 찾아왔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인간은 애초에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는 율법의 모든 조항을 이미 어려서부터 완벽하게 지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율법의 본질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결코 지킬 수 없는 ‘죄인’이라는 한계를
선명하게 드러내는데 있습니다.
예수님 께서는 젊은 관원에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온전히 지켰다면
지금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젊은 관원은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떠납니다.”
결국 “이것이 어려서부터 율법을 완벽하게 지켰다”고
말하는 그의 신앙의 수준이었습니다.
젊은 관원의 세번 째 오류는 그는 잘못된 신앙의 전제로 인해
심지어 영생의 의미 조차도 오해하였습니다.
젊은 관원이 생각한 영생은 그저 죽음 이후에 그의 영혼이 안전한 것을
의미할 뿐이었습니다.
여러분 영생이 무엇입니까?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참된 영생의 개념은 그저 ‘무한하고 영원한 시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참된 영생은 그저 무한히 영원토록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진화론적인 무한한 세계는 오히려 인간에게 두려움이고 공포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참된 영생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참된 영생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인격적인 관계에 동참하는 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영생은 영원한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그분과 영원히 동행하는 것,
그리고 바로 이 땅에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상호작용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참된 영생입니다.
영생 즉 하나님의 생명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영생을 소유한 사람들은 영원한 자유와 평안이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소망이 그 안에 있다.
또한 영생을 소유한 사람은 더 이상 나 자신이 주어가 되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시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여러분 청년의 아킬레스건이 무엇입니까?
바로 재물입니다.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재물을 포기하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속에 딱딱하게 굳어진 선입견이 무엇이냐하면
청빈 혹은 무소유 = 경건 이라는 신앙의 도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마치 무소유와 같은 불교적인 개념과 접목시킵니다.
결국 가난은 거룩한 것이고 부유함은 세속적인 것으로 이분법적으로 나눕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소유하는 것을 문제 삼으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작은 본문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문맥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태복음을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지적하시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은 누구보다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는데 열심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그들의 실제의 모습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눅16:13-14)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이것이 바로 젊은 관원과 그가 속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소유한 신앙의 실제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 께서는 그의 경건한 외적인 태도가 아닌 그의 심령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는 딱딱하게 굳어진 그의 신앙의 상태를 명확히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젊은 관원에게 위험한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 께서는 그에게 재물을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예수님 께서는 젊은 관원에게 요구된
그 위험한 순종에 철저히 순종하셨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빌2:6-8 )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시고 ...
모든 부귀와 영광과 명성을 가지신 성자 예수님 께서는 자기 자신이
‘주어’가 되는 것이 아닌 오직 성부 하나님께서 ‘주어’가 되셔서,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그 부르심에 기꺼이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심지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께서는 그 위험한 순종에 철저히 순종하셨습니까?
(막10: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생명을 내어줄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이 주어가 되시는 인생이 아닌 우리가
주어가 되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이 주인이 아닌 젊은 관원처럼
우리 자신이 주인이 되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둘 사이에서 머뭇하지 말고,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여러분 우리는 무소유 아닌 주 소유를 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의 주어가 되시고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의 주인이 되어주셔서 날마다
주님을 온전히 소유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3부_11시 예배
영생을 얻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소유해야만 하는가? (막4:35 ㅡ41)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오늘 본문의 등장하는 젊은 관원이 마치
외골격 생물과 같은 인생을 살았다고 평가합니다.
재물과 도덕적 성취는 딱딱한 외골격처럼,
젊은 관원을 보호하고, 생존하게 하는데, 매우 유리했습니다.
하지만 재물과 도덕적 성취는 오히려 하나님과 그 자신을 분리시키고
가로막는 방해장벽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그 껍데기의 보호를 받고 싶어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가로막는 그 방해장벽이 오히려
자기 인생을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안타깝게도 젊은 관원은 자신의 딱딱한 그 껍질을 뚫고
더 높은 상태로 성장하는 것을 스스로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6절)
20절에서는 그 사람이 청년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이미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갖추고 있었고
상당한 재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막10:20, 눅18:21)
이 청년 관원은 어렸을 때부터 훈련받고 도덕적으로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젊은 관원은 그가 속해 있던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달리
예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6절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원어> “그리고 보라(Behold) 한 사람이 그에게 와서”
‘보라 (behold) ’는 단어는 보통
놀라운 사건이 일어나고 있음을 강조할 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마태복음 12장을 살펴보면
마12:1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심지어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논의하였습니다.
아마도 젊은 관원도 산헤드린 공의회에 속한 관원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분위기를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상황을 알고서도 그는 공개된 자리에서
예수님께 나아와 경의를 표하였습니다.
젊은 관원은 어떠한 절박함과 절실함으로 인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을까요?
그의 영혼에는 어느 것으로 메워지지 않는 구멍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원에 대한 목마름 이었어요.
파스칼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워지는 구멍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영혼은 결국 그 구멍이 메워지지 않고 평생 누수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자신의 영혼의 구멍을 메꾸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행합니다.
그리고 이 영혼의 구멍을 메꾸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돈으로
명예로 권력과 사회적 성공으로 메우기 위해 노력합니다.
바로 이것이 부자 청년에 일어난 영적인 문제였습니다.
이 청년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고
무엇을 누릴까의 문제는 죽음 앞에선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지혜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젊은 관원은 영생을 얻는 문제에 있어서
그의 질문의 ‘주어’가 바로 그 자신이었어요.
이 말은 곧 그의 인생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스스로 죽음 이후의 영혼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미리
안전을 확보해 두고 싶었던 것입니다. .
그러나 소경 거지였던 바디매오는 그 ‘주어’가 젊은 관원과 사뭇 달랐습니다.
막10: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부자 청년에게도 이러한 태도가 필요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처절한 절망 가운데 “주님 나를 구원해 주십시오.”
- 여러분은 어떤가요?
그 이유가 혹시 이 때문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는 인생의 수많은 문제들에 눌린 채 전전긍긍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우리는 주님 앞에 나와서 간절한 마음으로 울부짖습니다.
주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만 합니까?
내가 무엇을 행하는 것이 옳습니까?”
그런데 정작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인생의 주도권을
우리의 손에서 내려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내가 어떻게 해결해야 될지 그 해결책만 달라는 거에요
정작 내 삶의 진정한 주인이신 주님께 나의 주도권을 내어드리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답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고 맙니다.
먼저 우리의 인생의 주어가 바뀌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인생이 주인이 되셔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역설적으로 젊은 관원에게
너는 선한 일을 행함으로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계명을 지킬 일이지 왜 나를 찾아왔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인간은 애초에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는 율법의 모든 조항을 이미 어려서부터 완벽하게 지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율법의 본질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결코 지킬 수 없는 ‘죄인’이라는 한계를
선명하게 드러내는데 있습니다.
예수님 께서는 젊은 관원에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온전히 지켰다면
지금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젊은 관원은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떠납니다.”
결국 “이것이 어려서부터 율법을 완벽하게 지켰다”고
말하는 그의 신앙의 수준이었습니다.
젊은 관원의 세번 째 오류는 그는 잘못된 신앙의 전제로 인해
심지어 영생의 의미 조차도 오해하였습니다.
젊은 관원이 생각한 영생은 그저 죽음 이후에 그의 영혼이 안전한 것을
의미할 뿐이었습니다.
여러분 영생이 무엇입니까?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참된 영생의 개념은 그저 ‘무한하고 영원한 시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참된 영생은 그저 무한히 영원토록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진화론적인 무한한 세계는 오히려 인간에게 두려움이고 공포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참된 영생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참된 영생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인격적인 관계에 동참하는 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영생은 영원한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그분과 영원히 동행하는 것,
그리고 바로 이 땅에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상호작용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참된 영생입니다.
영생 즉 하나님의 생명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영생을 소유한 사람들은 영원한 자유와 평안이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소망이 그 안에 있다.
또한 영생을 소유한 사람은 더 이상 나 자신이 주어가 되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시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여러분 청년의 아킬레스건이 무엇입니까?
바로 재물입니다.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재물을 포기하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속에 딱딱하게 굳어진 선입견이 무엇이냐하면
청빈 혹은 무소유 = 경건 이라는 신앙의 도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마치 무소유와 같은 불교적인 개념과 접목시킵니다.
결국 가난은 거룩한 것이고 부유함은 세속적인 것으로 이분법적으로 나눕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소유하는 것을 문제 삼으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작은 본문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문맥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태복음을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지적하시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은 누구보다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는데 열심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그들의 실제의 모습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눅16:13-14)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이것이 바로 젊은 관원과 그가 속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소유한 신앙의 실제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 께서는 그의 경건한 외적인 태도가 아닌 그의 심령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는 딱딱하게 굳어진 그의 신앙의 상태를 명확히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젊은 관원에게 위험한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 께서는 그에게 재물을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예수님 께서는 젊은 관원에게 요구된
그 위험한 순종에 철저히 순종하셨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빌2:6-8 )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시고 ...
모든 부귀와 영광과 명성을 가지신 성자 예수님 께서는 자기 자신이
‘주어’가 되는 것이 아닌 오직 성부 하나님께서 ‘주어’가 되셔서,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그 부르심에 기꺼이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심지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께서는 그 위험한 순종에 철저히 순종하셨습니까?
(막10: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생명을 내어줄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이 주어가 되시는 인생이 아닌 우리가
주어가 되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이 주인이 아닌 젊은 관원처럼
우리 자신이 주인이 되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둘 사이에서 머뭇하지 말고,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여러분 우리는 무소유 아닌 주 소유를 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의 주어가 되시고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의 주인이 되어주셔서 날마다
주님을 온전히 소유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